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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22. 2023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비스 왕가의 결혼 관계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한번째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하면 근친 결혼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근친결혼의 대명사가 된 것은 결혼 관계를 통해서 부르고뉴 공작령은 물론 에스파냐 지역을 얻게 되는 때부터 였습니다. 이 거대한 영지를 한명의 군주가 통제하기 힘들었고 결국 황제 카를 5세는 좀 더 부유한 지역이었던 에스파냐와 부르고뉴 공작령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줬고, 이미 총독으로 오스트리아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그대로 오스트리아 지역과 제국의 황위를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 개로 나뉜 가문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통혼을 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근친결혼이 심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근친결혼가계도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문 내 결혼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포르투갈이나 프랑스 왕가와도 지속적으로 통혼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훗날 에스파냐를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에 뺏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포르투갈과의 통혼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포르투갈 왕위마저 차지해서 한동안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 왕가와 합스부르크 가문이 처음 통혼한 것은 아비스 가문때로 두아르테의 딸이었던 레오노르가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첫 번째 대관한 황제였으며, 이후 선출직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는 모두 그의 후손들이 독점하게 됩니다. 사실 레오노르가 황후가 될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고모였던 부르고뉴 공작부인 이사벨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레오노르는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막시밀리안을 낳았으며, 막시밀리안은 레오노르의 고모인 이사벨의 손녀이자 부르고뉴 공작령의 상속여였던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하기도 했었습니다.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엘레오노르 황후(포르투갈의 레오노르),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부모


합스부르크 가문과 포르투갈 왕가가 다시 결혼관계로 엮이는 것은 마누엘 1세 시기였습니다. 사실 포르투갈은 이웃의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가와 지속적으로 통혼을 하고 있었으며, 마누엘 1세의 두 아내 역시 모두 카스티야 여왕과 아라곤 국왕의 딸들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지역이 합쳐진 에스파냐 지역을 상속받은 인물이 바로 황제 카를 5세(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였습니다. 카를 5세는 복잡한 상속관계 때문에 포르투갈과의 평화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원했고, 누나인 레오노르를 마누엘 1세와 결혼시키게 됩니다. 물론 마누엘 1세는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가 있었으며 레오노르는 비록 포르투갈의 왕비였지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낳았지만 딸만 살아남았으며 남편 역시 결혼 3년만인 1521년 사망합니다. 아마 레오노르는 다 큰 의붓아들이자 사촌이었던 주앙 3세의 궁정에서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권력을 가질수 없었고 결국 남동생이 있는 에스파냐로 돌아오게 됩니다. 후에 카를 5세는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했으며 결국 둘의 평화를 위해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와 카를 5세의 고모가 조약을 맺었고 이 조약의 결과로 레오노르는 프랑수아 1세의 아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레오노르), 포르투갈의 왕비, 프랑스의 왕비


포르투갈 왕가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연결고리는 계속해서 지속됩니다. 특히 포르투갈과 이웃의 에스파냐의 관계는 중요했는데 당대 포르투갈은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역시 에스파냐에 중요한 걸림돌이 될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포르투갈 측에서는 이전부터 카스티야와 이후 에스파냐와 평화를 누리는 것을 더 선호했으며, 에스파냐를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한번 포르투갈 왕가와 결혼을 통해서 동맹을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사실 먼저 결혼을 제안한 것은 마누엘 1세의 장녀인 이사벨와 황제 카를 5세였습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포르투갈과의 동맹은 누나인 레오노르를 마누엘 1세와 결혼 시킨 것으로 된다고 여겼으며 자신은 잉글랜드의 후계자가 될 사촌이었던 헨리 8세의 딸인 메리 튜더와의 결혼을 통해서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적이었던 프랑스를 견제하려했었습니다.      


사실 1521년 마누엘 1세가 죽고 주앙 3세가 즉위했지만, 사실 주앙 3세는 여전히 카를 5세의 사촌이었기에 카를 5세는 포르투갈과의 동맹 관계보다 다른 지역에 더 집중했었습니다. 하지만 1525년경 상황이 바뀌면서 카를 5세는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강화하려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주앙 3세도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결국 카를 5세는 막내여동생인 카타리나를 주앙 3세와 결혼시킵니다.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는 부르고뉴 공작 필립과 후아나 라 로카의 막내딸이었습니다.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보살핌을 받았던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막내였던 카타리나는 어머니 후아나 라 로카가 왕위계승권리 때문에 감금당하다시피 했던 시기에 어머니와 함께 있었습니다. 당대 합스부르크가문이나 카스티야 왕가에서 딸들에게도 매우 훌륭한 교육을 시켰었지만, 카타리나는 어머니와 오래도록 함께 갇혀서 지냈었기에 이런 혜택을 별로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앙 3세와 카나리나 사이에서는 모두 아홉아이가 태어났지만 이중 둘만이 성인으로 성장했고 이 둘도 부모보다 먼저 사망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포르투갈의 왕비


주앙 3세와 카를 5세는 다시 한번 동맹을 강조하는데 바로 주앙 3세의 여동생인 이사벨과 카를 5세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카를 5세는 메리 튜더와 나이차가 있었고 메리 튜더가 결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사벨과 결혼해서 빨리 후계자를 얻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국제적 상황도 바뀌었으며 전쟁 때문에 돈이 필요했던 카를 5세에게 이사벨과 지참금 역시 무시할수 없었습니다. 결국 1526년 카를 5세는 사촌인 이사벨과 결혼을 했습니다.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었던 카를 5세는 이사벨과의 결혼 역시 정치적으로 생각했지만, 곧 카를 5세는 아내에게 매료당했으며 이사벨 역시 현모양처로 남편과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되었다고 합니다. 둘 사이에서는 일곱아이가 태어났지만 이중 세명의 자녀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레오노르는 남편인 카를 5세보다 먼저 사망했는데, 카를 5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매우 슬퍼했으며 아내의 장례식에 참석할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검은 상복을입고 지냈으며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황제 카를 5세와 포르투갈의 이사벨


이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동맹은 더 강화됩니다. 특히 카를 5세는 자신의 자녀들을 가문의 결속을 강화하는 연결고리로 생각했습니다. 먼저 아들인 펠리페를 포르투갈의 주앙 3세의 딸이었던 마리아 마누엘라와 결혼시킵니다. 아마도 카를 5세는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당시 주앙 3세에게 남은 두 자녀가 마리아 마누엘라와 동생인 주앙 마누엘밖에 없는 것을 보았고 마리아 마누엘라의 포르투갈 왕위계승권리를 염두에 뒀을 것이기도 합니다. 펠리페와 마리아 마누엘라의 결혼은 매우 화려했었습니다만, 마리아 마누엘라는 결혼 2년후인 1545년 아들 카를로스를 낳은 뒤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사망합니다.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 펠리페 2세의 첫번째 부인


아마 카를 5세는 며느리가 죽은뒤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다시 한번 신경썼습니다. 그리고 1552년 나이대가 비슷한 둘째딸인 후아나를 주앙 3세의 유일하게 남은 적자이자 후계자였던 주앙 마누엘과 결혼시킵니다.  1554년 1월 주앙 마누엘은 임신한 후아나를 두고 사망했으며 후아나는 남편이 죽은 뒤에 아들인 세바스티앙을 낳았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후아나, 세바스티앙의 어머니, 카를 5세의 딸


세바스티앙이 갑작스럽게 죽고나서 그의 숙부인 엔히크가 왕위에 올랐습니다만, 결국 성직자로 자녀를 두지 못했기에 포르투갈에서는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포르투갈 내에서는 왕위계승자를 두고 서로 다른 세력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지했는데 그중에는 포르투갈의 인판타를 어머니로 둔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에서 지지세력이 자신을 국왕으로 원한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무력으로 다른 반대하는 사람들을 평정했고 결국 1581년부터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포르투갈 왕가와 카스티야-에스파냐 왕가의 가계도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문에서 전해져오는 말인 “축복받은 그대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라는 말처럼 결혼을 통해서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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