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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13. 2023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번째

포르투갈은 오래도록 이웃의 카스티야나 아니면 포르투갈처럼 카스티야와 갈등을 자주 빚었던 아라곤 왕가와 자주 통혼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특히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면서 더욱더 중요해지게 됩니다.     


카스티야의 여왕인 이사벨과 아라곤의 국왕인 페르난도 2세는 결혼을 했고 둘의 결혼을 통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하나의 연합왕국인 에스파냐를 형성합니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 지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포르투갈은 이제 국경이 맞 닿은 곳은 에스파냐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포르투갈은 주변에 가장 강력한 국가인 에스파냐와 평화롭게 지낼 필요가 있었으며 이것은 두 왕가간의 결혼을 통해서 동맹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됩니다.     


주앙 2세는 자신의 아들인 아폰수를 가톨릭 공동군주의 장녀였던 아라곤의 이사벨과 결혼시켰습니다. 이것은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갈 간의 갈등을 조정한 것으로 특히 주앙 2세의 아버지였던 아폰수 5세가 카스티야의 왕위를 주장하면서 카스티야와 전쟁을 했었기에 두 나라간의 갈등을 조정할 필요가 있았습니다. 하지만 주앙 2세의 유일한 적자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아폰수는 사고로 1491년 사망했으며, 20살에 과부가 된 이사벨은 고향인 카스티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판테 아폰수의 죽음


하지만 주앙 2세의 사촌이자 후계자였던 마누엘 1세는 1495년 왕위에 오른뒤 카스티야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사벨과의 결혼을 추진합니다. 이사벨의 부모인 가톨릭 공동 군주는 딸이 재혼하지 않고 죽은 남편을 기리며 살고 싶어하는 것을 잘 알았고, 이사벨이 아니라 이사벨의 미혼인 동생이었던 마리아를 신붓감으로 추천했었습니다. 하지만 마누엘 1세는 이사벨을 아내로 얻길 원했으며 결국 이사벨은 개종하지 않은 모든 유대인들을 포르투갈에서 추방한다는 조건으로 마누엘과의 결혼을 동의했으며 마누엘은 조건을 승낙했고 1495년 9월 둘은 결혼을 합니다.      


마누엘 1세


여기서 잠깐

이사벨이 유대인들을 추방하라고 한 이유는, 이사벨은 첫 번째 남편인 아폰수와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고로 죽은 것은 주앙 2세가 에스파냐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기에, 하느님께서 노하셔서 주앙 2세의 후계자를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대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심하게 차별받았으며 특히 에스파냐 같이 가톨릭을 통일의 사상의 중심으로 삼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었던 곳에서는 훨씬 더 힘들었는데, 이사벨의 부모인 가톨릭 공동군주는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할 정도였었습니다.      


아라곤의 이사벨, 마누엘 1세의 첫번째 부인


이사벨과 마누엘이 결혼한 직후인 1495년 10월 이사벨의 남동생이자 가톨릭 공동 군주들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이 사망합니다. 후안의 아내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임신중이었지만 딸을 사산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갑작스럽게 이사벨의 지위가 바뀌게 됩니다. 이제 가톨릭 공동군주의 장녀로 이사벨은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상속녀가 되었으며 공식적으로 후계자인 아스투리아스 여공 지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사벨의 여동생인 후아나와 그녀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작 필립 역시 상속을 주장했지만, 이사벨이 장녀였기에 이사벨에게 우선 순위가 있었습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립과 카스티야의 후아나, 이사벨의 여동생 부부


이사벨은 아스투리아스 여공이 되었으며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가 됩니다. 특히 아라곤에서는 이사벨이 아들을 낳을 경우 그 아들이 왕위를 잇게하기로 결정합니다.이렇게 되면서 이사벨의 아들은 더욱더 중요한 위치가 됩니다. 이사벨의 아들은 어머니의 권리로 아라곤과 카스티야를 상속받을 것이며 아버지의 권리를 통해서는 포르투갈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사벨의 아들이 전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할 가능성이 컸었습니다.     


1498년 8월 23일 이사벨은 남편과 부모가 바라던 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의 지위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이사벨은 부모와 함께 아라곤 지역이었던 사라고사에 있다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직후 이사벨은 사망합니다.      


아이는 미겔 데 파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아이는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이자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였습니다. 아이는 바로 아스투리아스 공 지위를 받았으며 외조부모의 품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성모마리아 앞의 가톨릭 공동군주, 자녀들인 후안과 이사벨이 잎고 성모가 안고있는 아이는 미겔을 모델로 그린것이라고 추정한다고 합니다.


미겔의 존재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합하길 원했던 가톨릭 공동군주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마누엘 1세에게도 미겔은 자신의 가문이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치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기대에 헛되게 미겔은 2살이 되기 직전인 1500년 7월 외할머니인 이사벨 여왕의 품안에서 사망했습니다.      


아들이 죽은 뒤 마누엘 1세는 다시 카스티야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사벨의 여동생이자 처음 신부후보로 거론되었던 마리아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는 10명의 아이가 계속해서 태어났습니다.     


마누엘 1세와 그의 아내인 아라곤의 마리아 그리고 둘의 아이들


하지만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위는 결국 이사벨의 여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였던 후아나의 후손들인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이어받게 되었으며, 후아나의 아들인 황제 카를 5세는 할아버지로부터 오스트리아와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았고, 아버지로부터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물려받아서 또 다른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습니다. 비록 카를 5세는 제국과 오스트리아는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넘겼지만, 부르고뉴와 에스파냐 지역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펠리페 2세 시절 그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펠리페 2세는 결국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통치하게 됩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첫번째 포르투갈 국왕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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