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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29. 2023

나도 왕위를 얻을 수 있잖아! :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두번째

포르투갈의 카타리나는 포르투갈의 국왕 마누엘 1세의 손녀로 카타리나의 아버지는 마누엘 1세의 막내아들이었던 기마랑이스 공작 두아르테였습니다. 기마랑이스 공작 두아르테는 사촌인 브라간사 공작 하이메의 딸이었던 브라간사의 이사벨과 결혼했으며 딸들인 마리아와 카티리나 그리고 아들인 두아르테가 태어났습니다.   


인판테 두아르테, 기마랑이스 공작, 카타리나의 아버지

  

주앙 3세의 후손들이 점차 사라지면서 결국 주앙 3세가 죽을 무렵 남은 왕위계승권리를 가진 아비스 가문의 사람은 주앙 3세의 손자인 세바스티앙과 주앙 3세의 동생인 추기경 엔히크 그리고 주앙 3세의 조카였던 두아르테 2세밖에 없었습니다. 두아르테 2세는 포르투갈 내에서 인기가 있었고 세바스티앙은 이를 질투했었다고 합니다. 결국 두아르테 2세와 세바스티앙은 사이가 나빠졌으며 결국 두아르테 2세는 궁정을 떠나버렸고 1576년 미혼인 상태로 사망합니다.   

   

카타리나의 언니였던 마리아는 파르마 공작이 되는 알렉산드로 파르네세와 결혼합니다. 알렉산드 파르네세는 파르마 공작 옥타비오 파르네세와 카를 5세의 사생아 딸인 마르가레테의 아들이었습니다. 카를 5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사생아 딸인 마르가레테를 파르마 공작과 결혼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는 에스파냐 궁정에서 성장했으며 외삼촌인 펠리페 2세와 함께 자라났습니다.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는 아버지와 외삼촌의 결정에 따라서 기마랑이스 공작의 딸이었던 마리아와 결혼했었습니다. 기마랑이스의 마리아는 알렉산드로 파르네세와의 사이에서 세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만 1577년 사망했습니다.      

파르마 공작부인 마르가레테(카를 5세의 딸, 왼쪽)와 며느리인 기마랑이스의 마리아(오른쪽)


카타리나는 사촌이었던 브라간사 공작 주앙 1세와 1563년 결혼을 했으며 둘 사이에서는 아홉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카타리나가 주앙 1세와 결혼했을때는 그녀가 왕위계승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1576년 남동생인 두아르테 2세가 사망했고 기마랑이스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원래 기마랑이스 공작령은 카타리나의 어머니인 브라간사의 이사벨이 지참금으로 가져온 영지였고, 남성 후계자가 없을 경우 브라간사 공작 가문이 다시 가져가기로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아마도 사촌인 브라간사 공작과 결혼한 카타리나가 기마랑이스 공작령을 이어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578년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위계승자는 바로 추기경이었던 카타리나의 백부인 엔히크였습니다. 그리고 엔히크는 성직자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결국 왕위계승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왕위계승자 후보들이 여럿 있었는데 가장 유력한 인물들은 두 명이었습니다. 바로 주앙 3세의 외손자인 에스파냐의 국왕인 펠리페 2세와  카타리나의 사촌이지만 사생아였기에 포르투갈의 상속권리가 없었던 안토니우였습니다.      


하지만 상속권리의 명분은 좀 달랐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명분을 가진 사람은 바로 카타리나의 조카였던 라누치오 파르네세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마누엘 1세의 외손자였지만, 기마랑이스 공작의 딸들은 마누엘 1세의 친손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기마랑이스 공작의 큰딸이었던 마리아의 아들들인 파르마 공작의 아들들이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파르마 공작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는 에스파냐에서 자라났었을뿐만 아니라 외삼촌인 펠리페 2세와 좋은 관계였었습니다. 파르마 공작은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이 좋은 외삼촌과 굳이 포르투갈 왕위계승문제로 사이가 틀어질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듯합니다. 게다가 포르투갈 내에서도 외국인이었던 파르마 공작의 아들을 국왕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지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카타리나의 조카인 파르마 공작 라누치오 1세 파르네세


아마 조카들이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하지 않자, 카타리나는 다음 순위로 당연히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강력한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노리고 있었지만, 포르투갈 내에서는 포르투갈의 독립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서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카타리나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포르투갈의 왕위를 얻을 명분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카타리나의 남편인 브라간사 공작은 포르투갈내에서 가장 권력이 큰 귀족중 한명이었으며 그 역시도 아내보다는 명분이 약하긴하지만 마누엘 1세의 누나의 후손으로 포르투갈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카타리나가 더욱더 포르투갈 왕위계승에 대한 자신과 자신의 후손 권리가 크다고 생각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카타리나의 남편인 브라간사 공작은 아내의 왕위계승을 지지했습니다. 펠리페 2세는 브라간사 공작을 회유하기 위해서 다양한 지위와 부 그리고 심지어 자녀들간의 결혼까지도 제안하게 됩니다. 하지만 브라간사 공작은 이것을 거절하고 아내를 왕위계승자로 지지했었습니다.     


카타리나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그림 정보가 정확히 안나오네요.)


1580년 카타리나의 백부였던 엔히크가 사망하면서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마 카타리나는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카타리나의 예상과 달리 포르투갈 내에서는 귀족들은 상당수가 펠리페 2세에게 포섭되어서 펠리페 2세를 지지했었으며, 포르투갈의 독립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여성이었던 카타리나가 아니라 사생아였던 카타리나의 사촌인 안토니우를 지지지하게 됩니다.      


결국 카타리나의 야망은 좌절되었으며, 포르투갈의 왕위는 펠리페 2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카타리나의 남편은 포르투갈 최고 권력자중 한명이었으며 카타리나 역시 무시할수 없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펠리페 2세는 국왕이 된 뒤 브라간사 공작 가문에 많은 이익을 부여합니다. 이런 상황은 카타리나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라간사 공작이 된 테오도지우 2세는 국왕이 된 펠리페 2세에게 충성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583년 남편이 죽은뒤 카타리나는 사촌인 펠리페 2세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 포르투갈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를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펠리페 2세가 자신의 딸중 한명을 카타리나의 아들인 브라간사 공작 테오도지우 2세와 결혼시키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카타리나가 이를 거절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아들과 펠리페 2세의 딸을 결혼시켰을 경우 자신과 브라간사 가문이 펠리페 2세를 지지했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서였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이 포르투갈을 통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망했었습니다. 살아생전 카타리나는 포르투갈의 왕위를 얻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60년이 지난뒤 카타리나의 손자인 브라간사 공작 주앙이 할머니인 카타리나의 권리를 통해서 포르투갈의 왕위를 주장하면서 결국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로 즉위하면서 자신의 후손이 포르투갈의 왕위를 이어받길 원햇던 카타리나의 야망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카타리나의 손자, 브라간사 공작 주앙 2세, 후에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 브라간사 가문의 첫번째 포르투갈의 국왕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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