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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Jul 05. 2022

국화와 칼

일본인 1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는 그 일본인의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미안하지만 그렇다. 그와의 인연은 2003, 4년 경 중국 상하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월마트 까르푸 등 중국의 대형유통매장에 우리나라 유자차를 공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사무실로 불쑥 찾아와 자신을 소개했다. 중국에서 일본산 마요네즈를 판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에 대한 정보는 까르푸 중국 본부의 수입식품 담당자로부터 들었는데 불시 방문이 불쾌하다면 사과하겠다고 했다. 정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내 사무실로 찾아온 이유는 사업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당시 중국 대도시의 100여개 대형유통매장과 거래하고 있었는데 그 공급선에 자신의 마요네즈를 얹어달라는 것이었다. 대신 자신의 거래처에 내 제품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모두 나를 배려한 것이어서 위험 부담이 거의 없는 좋은 조건이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그와 더 이상 사업적 교류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유는 내 사업의 정체성 문제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당시 중국의 대형유통매장 진입을 통해 우리나라 가공식품의 중국시장 진출 통로가 되겠다는 사업적인 목표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제품을 런칭하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다. 많이 아쉽기는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와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그 친구가 뜬금없이 가끔 연락해 왔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우선 우리는 같은 연배에다 둘 다 가족을 떠나 혼자 중국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업적으로는 중국시장 개척 의지가 강했고, 자기 나라 제품을 중국인들에게 팔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또한 둘 다 운동과 사우나를 즐기고 술은 멀리 하는 성향이었다. 골프 핸디도 막상막하인데다 입맛까지 비슷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큰 거부감이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서툰 중국말에다 어설픈 영어를 섞고 거기에다 유창한 바디랭귀지까지 더하면 의사소통도 문제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친구가 되어 갔다. 우리는 상하이 옌안시루延安西路에 있는 일본영사관 근처 일식집에서 밥을 먹고 홍매이루虹梅路의 샤오난궈小南国에서 사우나를 즐겼다. 내가 회원권을 가지고 있던 골프장에서 같이 라운딩도 하곤 했다. 그러던 중 2005년 경 내가 북방시장 개척을 위해 베이징으로 떠나게 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 친구는 드문드문 내게 전화를 했지만 나는 그리 적극적으로 그에게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사업적으로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 내 불찰과 중국 직원들의 배신, 농간에 의해 회사를 통째로 빼앗긴 나는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혼이 빠진 상태였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도움 요청을 거절하는 지인이 있는가 하면 ‘까불 때 알아봤다’고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 북경 대사관과 상해 영사관을 미친 듯이 찾아다니며 절규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심지어 북경 대사관의 법무관 소개로 만난 상해 영사관 직원은, 절망하고 있는 내 면전에서 ‘일도 제대로 모르는 초짜!’ 라며 소개한 사람을 비난하는 꼴까지 봐야 했다. 그들 모두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본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소식은 대충 들었다며 당장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므로 지체 없이 그와 마주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그날 저녁 곧바로 일본 영사관 직원과 만나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를 하는 게 좋을지 조언을 듣고 내게 전했다. 이튿날에는 직접 일본 영사관 직원을 데리고 나와 저녁을 같이 했다. 또 그 다음날에는 다른 일본인 사업가를 데리고 나왔다. 그에게도 나를 도와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는 상하이 공안국 고위층과 교분이 깊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진중하고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여기서 그때의 일들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 일본인은 정말 최선을 다해 나를 도우려고 했다. 그때까지 어떤 한국인들로부터 느낄 수 없었던 진심어린 도움을 주려고 진력했다. 비록 판세를 뒤집지 못했지만 그때 자신의 일처럼 동분서주했던 그 일본인의 마음은 아직까지 내 가슴에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연락이 끊어져 버린 그를 생각하면 미안하다.


일본인 2


 나는 많은 우여곡절을 뒤로 한 채 십 년간의 중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0년이었다. 그 즈음에 나는 모 실업계 여자고등학교에서 무역업무 실무와 생활 중국어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강사를 통해 학생들의 실무 역량을 높이려는 교육 당국의 취지에 내 이력서가 어느 정도 부합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무역 현장을 누볐던 경험자인데다가 무역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외국환 업무에 대해서는 은행원 시절 습득한 기초 지식이 있었고, 거기에다 때마침 우리 사회에 불던 중국어 열풍까지 감당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로 초빙되어 분필을 쥐게 된 것이다. 뜻하지 않았던 생소한 일이지만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해서 열심히 임했다. 그러나 계속 그 생활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내 사정과 애시당초 강사로서의 함량과 자질이 부족했던 내가 그 일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학교를 떠나기로 하고 짐 정리를 하던 마지막 날, 어느 젊은 선생이 나를 찾아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이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는 원어민 선생 이타노 신세이였다. 사실 학교에 있는 동안 그와 가끔 대화를 나누었을 뿐 서로의 속정까지 주고받은 적은 없어 의아스러웠다. 나는 일본어를 전혀 몰랐지만 그는 한국말을 잘했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그의 편지에는 만나서 반가웠다는 개인적인 소회와 함께 자신의 이력과 관심 분야에 대해 정성껏 적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연락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자신의 명함 한 장을 동봉했다.

편지 봉투 겉봉에 내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정성스럽게 썼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그의 편지는 내게  깊은 감동을 전했다


 그 편지는 내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전했다. 수십 명의 그 학교 교사들 중 어느 누구도 내게 석별의 정을 표시한 사람은 없었다. 나의 마지막 그날이, 그들에게는 그저 또 한 명의 기간제 교사가 출몰했다가 사라지는 숱한 일상 중 하루였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애틋한 이별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들과 입장을 바꾼들 나 역시 누군가를 무덤덤하게 떠나보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하는 게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줄이고 애매한 인간관계를 사전 차단하는 효율적인 자기 관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박수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한 인간의 ‘존재 가치’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행위의 차이는 너무나 크고 명백하다. 그날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은 그 일본인뿐이다. 그로부터 편지를 받고 읽어내려 가는 순간 나도 이 세상에서, 또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일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내가 중국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은 후 정신적으로는 거의 자폐 상태에 머물러 있던 시기여서 그 자의식은 나를 일깨우는 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도 그에게 연락한 적은 없다. 변명임을 알지만 그때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워낙 열악했던 시기여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 차리고 난 후 몇 번인가 샅샅이 뒤져봤지만 끝내 그의 명함을 찾지 못했다. 그에게도 미안하다.

떠날 때 아이들이 전해 준 짧은 쪽지도 잊을 수 없다. 아이들 역시 힘들었던 내게 큰 의미를 주었다


일본인 3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매년 여름방학 때쯤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를 찾아오던 일본 사람이 있었다. 그와 아버지가 어떤 인연으로 만나 어떻게 지내던 사이인지 자세히는 모른다. 해방되던 해 아버지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이라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은 게 전부다. 혼자 아버지를 찾아오던 그가 어느 해부터는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깍듯했다. 일본인들의 정중하고 진중한 모습의 전형이었다. 우리 눈에는 다소 과해 보여서 늘 그들의 진정성과 이중성을 의심 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의 방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까지 계속 이어졌다. 1991년 한여름에 그가 또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지는 1990년에 돌아가셨다. 그는 아버지 산소에 가고 싶다며 안내를 부탁했다. 아버지 산소에 엎드려 통곡하던 그 일본인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내 아버지인데도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까지 울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매미가 쌕쌕 울어 재낄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그 일본인도 이제는 저 세상으로 떠났을 것이다. 함께 왔던 그 아들이 나와 비슷한 연배였으니. 먼발치서 봐도 유난히 새까맣던 그 아들의 머리도 지금쯤은 희끗할 것이다. 내 머리가 이렇게 희끗해졌으니 그도 별 수 없을 것이다.


국화와 칼


 <국화와 칼>이란 책이 있다. 루스 베네딕트라는 여성 인류학자가 일본 문화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해 펴낸 책이다. 귓등으로 들은 말인지 책 어딘가에서 읽었던 내용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2차 세계대전을 끝낸 미국이 일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무성에서 주도해 발간된 책이라고도 한 것 같다. 나 같은 범부에게 친절한 책은 아니었다. 펼쳐 보니 워낙 학구적인 내용이어서 집중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듬성듬성 읽다가 결국 끝장을 못 보고 덮었다. 읽을 때는 문장이 이해되었지만 덮고 나니 책 제목만 기억났다. 그만큼 국화와 칼이 일본인과 그들의 문화를 함축적으로 잘 요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의바르고 겸손하며 착하게 보이는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멋진 제목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고 겪은 일본인들은 하나 같이 ‘국화’였지만 우리나라와 세계가 경험한 일본은 ‘칼’이었기에 신빙성은 배가되었다.


 흔히 일본을 축적의 사회라고 한다. 그들은 무엇이든 기록하는 모양이다. 기록을 통해 축적하고 축적을 통해 발전하려는 그 민족의 좋은 습성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방의 마음속에 자신을 기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만나면 겸손하고 예의 바른 일본인이 집단적으로 대치하거나 뭉뚱그리면 ‘왜놈’과 ‘쪽바리’가 되어버리는 그들, 비록 그 거친 언사 속에 우리 민족의 피해 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할지라도 조직화되면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 이면에는 집단 규범을 위해서라면 잔혹함과 무도함까지 불사해야 하는 한 떨기 국화의 난처함도 엿보여 애달프기도 하다. 어쨌든 그들은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뭉치면 위험하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개인이든 국가든 살기 위해서는 똘똘 뭉쳐야 하는데 뭉치면 뭉칠수록 위험해지는 존재,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국가적 딜레마일 수도 있겠다. 지난 정권 때에는 경제보복이니 화이트리스트 제외니 반도체 전쟁이니 하며 두 나라가 서로 밉다고 아우성이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개인이든 국가든 살기 위해서는 똘똘 뭉쳐야 하지만 어쩌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생존 조건은 '변화'인지도 모른다. 우경화의 상징이었던 아베 정권이 먼저 바뀌었고 죽창가를 부르짖던 우리나라의 정권도 바뀌었으니 이제는 서로가 조금씩 더 변화하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의 가슴속에는 국화가 만발하고 우리 마음속에 박혀 있는 죽창의 칼날은 조금씩 더 무뎌지면 좋겠다.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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