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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Sep 27. 2022

아내의 결혼 흑역사

다시 사랑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제언

 나는 지금까지 주변에 아내를 소개할 때 사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남편이 사망하기는 했지만 아내와는 그전에 이미 이혼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혼자가 된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달라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느 부부가 이혼했다고 하면 유독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급한 사람들은 듣자마자 대놓고 이유를 묻고, 당장은 참았다가 야금야금 묻는 사람도 있다. 이든 저든 끝까지 알아내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그러나 사별했다고 하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듣는 순간 이미 측은지심으로 가득 채워져 사람들이 이혼에서 유추하는 '불량'이나 '부정'의 요소는 아예 없다.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설명하는 게 좀 번거롭기도 하고, 같은 값이면 아내의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덜 훼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별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만 들어보면 아내의 '행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지도 모른다.


 "뭘 하긴요? 보나 마나 아직까지 남자 찾아다니고 있을 거예요."


 저녁 산책길에,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뭐 하고 있었을 것 같으냐는 물음에 아내가 한 대답이다. 연애를 할 때에도 아내는 주변의 소개를 통해 여러 번 선 봤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상대가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기 원칙은 확고했던 것 같다.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쨌든 아내는 이혼 후 세상의 남자들을 예의주시하면서 20여 년 동안 혼자 살았다. 그러면서도 좀 특이했던 것은, 애초부터 남자의 재력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돈이 없는데 돈 있는 남자를 기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돈 많은 남자가 자기 같은 여자를 좋아할 리도 없으며, 무엇보다 돈이 중심이 되는 삶은 행복해질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 분수를 알고 거기에 맞춰 살면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많은 돈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아내의 이런 비현실적인 철학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나였다. 내가 올바른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는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지만 '없는 사람'임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이런 '남자 갈구' 증상은, 결혼은 했지만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은 해보지 못한 아쉬움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내의 서류상 혼인 기간은 7년이지만 실제로 전남편과 같이 산 세월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꿈꿨던 행복은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셈이다. 아내가 전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친구의 피로연에서였다. 그때 아내는 스물일곱의 처녀였지만 전남편은 돌 즈음의 딸이 있는 이혼남 신분이었다. 이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며 호감을 보이는 데다, 운동선수 출신의 건장한 체구에 성격도 좋아 보여 아내도 좋은 감정을 가졌다고 한다. 그렇게 연애를 하다가 일 년 후 그와 결혼하고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전남편은 4살 연상의 외동아들이었다.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데다 전처의 딸까지 키우는 일이 힘들기는 했지만 자신이 선택한 일이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돈 벌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남편의 '바깥 생활'이 문제였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더니 몇 달 뒤에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시어른들 역시 '어디 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고 하니 아내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임신을 한 상태여서 함부로 집을 뛰쳐나올 수도 없었다. 얼굴 없는 남편은 드문드문 보내는 몇십만 원의 생활비조차 시어머니한테 부쳤고 그마저도 들쑥날쑥하다가 사실상 끊어져버렸다.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출산 백일 만에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서야 했다. 그때부터 화장품 외판, 사설 학원 영업, 식당 알바, 심지어는 낚싯바늘 끼우는 부업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집안 살림을 꾸렸다. 남편은 돈이 필요할 때만 불쑥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아내는 그렇게 남편 없는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전처소생과 자신이 낳은 딸을 키우며 5년여를 살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돈방석에 앉게 해 준다는 남편은 휴대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는 형체 없는 소문만 바람을 타고 가끔씩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문득 어린 딸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시부모에게 방을 따로 구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남자는 마흔 넘으면 힘이 빠져서 돌아오니 그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라며 거절했다. 이에 아내는 행복은커녕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을 여기서 끝내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아내는 이혼조차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없으니 합의이혼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재판을 통한 이혼 또한 소장을 송달할 수 없어 시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을 행방불명 신고한 후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공시송달 절차를 거쳐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말이 쉽지 법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겠는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전남편은 끝내 법정에 나타나지 않아 궐석재판으로 소송이 진행되었고, 아내는 판사에게 아이의 양육권은 자신이 가지겠다고 한 후 마침내 이혼 판결을 받아냈다. 위자료는커녕 남편 없는 집에서 7년 동안 식모살이하다가 빈손으로 집을 나온 것이다. 아이의 양육비는 법전에서나 있는 사치일 뿐이었다. 시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산 피아노마저 못 가져가게 막았다. 아내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끝났지만 고통은 끝이 아니었다. 결혼 초창기에 사업 핑계를 대며 아내 명의의 신용카드를 가져간 남편이 사용대금과 카드론을 갚지 않아 아내가 신용불량자 신세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캐피털을 이용해 아내 명의로 산 차량마저 전남편이 부채를 갚지 않은 채 현금만 챙기고 팔아버려 거액의 빚까지 떠안아야 했다. 이혼하기 얼마 전 불쑥 나타나 차를 정리해줄 테니 인감이 필요하다는 전남편에게, 이제부터라도 허황된 꿈 버리고 같이 포장마차라도 하자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뒤돌아서는 그에게 "차 팔고 빚 안 갚으면 당신은 인간도 아니다."라며 애원 섞인 경고를 했건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어린 딸을 키우기 위해 새벽에 건물 청소를 하며 생활을 이어가던 아내로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아이를 안고 시집을 찾아가 시부모에게 항의해봤지만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대화조차 거부했다. 오히려 눈물 흘리며 돌아서는 아내의 뒤통수에, 아들이 좋은 여자 만나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는 돌덩이를 던졌다.


 "엄마, 저예요......."


 아내는 결국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땀 흘려 번 돈으로 조금씩 빚을 갚아나가고 있던 어느 날, 휴대폰을 통해 흘러나온 뜻밖의 음성이었다. 처음 듣는 앳된 목소리였지만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낳은 딸은 아니지만 돌 즈음부터 직접 기저귀를 갈아 채우며 키운 전처소생의 딸이었다. 삶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그때 도저히 함께 데리고 나올 수 없었던 아이가 8년 만에 아내를 찾은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헤어진 아이는 어느덧 고1이 되어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아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엄마'를 원망하면서 살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호적등본을 접한 아이가 할머니를 추궁한 끝에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연락해온 것이다. 그때까지 아이에게 아내는 자신을 놔두고 동생만 데리고 도망쳐버린 '나쁜 엄마'였다.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 전남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내키지 않은 걸음이었지만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아이는 "아빠"라고 울부짖었고 전남편은 그저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아이들 아빠는 이틀 후 사망했다. 아내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전처소생의 딸아이가 불쌍해 "앞으로는 서로 연락하면서 살자"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아내는 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자신도 넉넉지 않은 살림이니 매달 꼬박꼬박은 아니어도 가끔 용돈을 쥐어주는가 하면, 학부모 모임에서 연락이 오면 기꺼이 간식을 만들어 학교를 방문했고, 대학 입시 때는 아이를 데리고 직접 학교까지 동행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자신을 그토록 모질게 대했던 전 시어머니와 조우해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아내는 그때 처음으로 "미안하다."라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가 대학 생활할 동안에는 재정적으로 보탬이 되도록 조카의 과외 공부를 지도하게 하면서 아이를 보듬었다. 아내 교회의 어느 지인이 사연을 듣고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달 20만 원을 몰래 지원한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가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다행히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아이는 대학 졸업 후 공기업에 취업해 결혼한 것이다. 그 아이가 결혼하는 날 아내는 한복을 차려입고 혼주석에 앉아 진심으로 아이의 앞날을 축복했다. 이후 아이는 모든 게 안정되어서인지 서서히 연락이 뜸하더니 이제 아내와는 연락을 끊다시피한 상태다. 출산 소식을 듣고 아내는 아이의 속옷과 미음 거리까지 준비했지만 끝내 전달하지 못했다. 곁에서 말없이 지켜봤던 내가 섭섭할 법도 하다 싶어 아내에게 내심을 물어봤다. "둘이 잘 살면 돼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 아니니 섭섭할 것도 없고,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도 없어요."라고 했다.


 팔불출 같지만 나는 아내가 자랑스럽다. 고통으로 점철된 어두운 인생 터널을 걸어 나오면서도 따뜻한 품성과 삶의 지혜를 잃지 않아서다. 아내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내가 만약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느냐."는 핀잔의 말을 던졌다면 자신은 더 이상 과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자신의 과거는 내면에서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괴롭혔을지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저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 내게 과분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응어리는 누군가가 귀담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겁고도 아픈 과거를 짐 졌던 사람이 비단 아내뿐이겠는가. 사연이나 무게가 조금씩 다를 뿐 재혼의 문턱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지난 삶이 힘겨웠던 사람들이다. 이들과 마주한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의 외양을 평가하고 조건을 저울질하기 전에 먼저 따뜻한 말과 깊은 마음으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노력을 하는 게 어떻겠는가.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토양이 더 단단해질 것이고 그 혜택은 당신에게 배가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그들 모두는 삶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함께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몸소 체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혜택이 없은들 어떠한가. 그 자체로 좋은 일인 것을.


 "연蓮이다."


 아내의 지난 과거를 들은 친구가 아내를 가리켜 한 말이다. 때마침 자욱하게 연蓮으로 뒤덮인 집 근처의 연못을 산책하던 중 널따란 연잎 위에 백로 한 마리가 고고한 자태로 서 있었다. 나는 불현듯 내 아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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