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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Oct 13. 2022

善惡이 皆吾師라!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

 남녀를 불문하고 대체로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면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는 언사가 아닌가 싶다. 그것이 칭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사실 그런 일은 잘 없다. 칭찬이야 그냥 해도 좋은데 굳이 남들과 비교해가면서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은 자신이 비난 내지는 비교 열위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듣기 거북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남과 견주어서 말하는 게 요지의 전달이 쉽고, 타격의 정확도나 펀치의 강도가 세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교'는 언뜻 보기에는 설명의 도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말싸움의 무기로 활용되어 감정 촉발의 도화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대화에서 남들과 비교하는 언행은 그 자체로 이미 싸움의 불씨를 안고 있다. 특히 남녀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음으로든 양으로든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자주 비교할 수밖에 없는 부류가 있다. 과거의 실패를 딛고 다시 사랑을 하게 된 사람들이다. 특히 재혼 부부의 경우 거의 일상적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그들의 눈으로는 현재 배우자의 모습을 보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같은 상황에서 했던 과거 배우자의 행동과 사고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현재 배우자의 행동이 늘 모범적일 경우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사실 사람의 행동이 항상 그러기는 쉽지 않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언행이 나올 수도 있고, 사람인 이상 서서히 초심이 무뎌질 수도 있다. 또한 비교하는 입장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원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비교해 상대를 질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불행의 단초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혈관에 차곡차곡 쌓이는 콜레스테롤이 만병의 근원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재혼 부부의 삶을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우리 부부는 아직까지 감정 조절이 안 될 정도로 언성을 높여 크게 부부 싸움을 한 적은 없다. 지금까지 한두 차례, 한나절이나 하룻밤 정도 입 다물고 서로 곁눈질한 게 전부다. 우리가 이 정도에 그치는 것도 아내가 우리의 삶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사는 덕택인 것 같다. 가난하게 살고 있어도 부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남편인 내가 좀 부족해도 '내가 복 받아서 이런 사람 만났다'는 듣기 민망한 멘트를 가끔 날리니 싸울 일이 없다. 빈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말을 들으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내 속내를 알고 그러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이처럼 아내는 시비 걸지 않고 나는 시비 걸 건덕지가 없으니 평온한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공적인 재혼 부부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비교하지 않으며 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또 있는 것 같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이다.


 재혼은 다시 결혼하는 것이다. 사별의 경우를 제외하면 재혼의 전제 조건은 이혼이고, 이혼의 전제조건은 결혼이다. 이처럼 결혼과 이혼과 재혼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져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어느 지점에서 한 바퀴를 돌면 출발한 곳과 정반대의 면에 도달하고, 계속해서 두 바퀴를 돌면 처음의 위치로 돌아온다. 뭔가가 꼬이면 원하는 곳의 반대쪽에 도달하고 그래도 같은 방향을 향해 계속 갈 경우 결국 제자리로 다시 되돌아오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똑같은 의식과 행동으로 일관하면 재혼 생활의 결과도 또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재혼 부부가 다시 헤어질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어쩌면 이와 같은 맥락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거나 재혼 부부로서의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은 실패의 경험이 쌓여 있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틀린 문제를 다시 틀리지 않기 위해 오답노트를 쓰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혼 후 나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다. 제일 먼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이 앞섰고 원망과 회한의 감정 때문에 많이 괴로워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되어야 했나 하는 마음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잘못한 게 있어도 누구라도 그 정도의 잘못은 하고 사는 거 아니냐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오히려 너그럽게 받아들여주지 않은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오히려 너그럽지 못했고 잘못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철저한 반성이 부족했으며 왜 소통하려는 노력을 좀 더 많이 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커져갔다. 결국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내 잘못이 가장 크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아웅다웅하기는 했어도 십수 년을 살면서 고마웠던 일이 왜 없었겠는가. 무엇보다 이 세상에 내 자식들을 태어나게 한 고마움만큼은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조차 날 선 감정 속에 파묻어버렸으니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많이 미안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지금 내 마음속에서만 일렁거리는 감정일 뿐 직접 대면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할 용기는 없다. 그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 만나 내가 주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끼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한 국가의 정세나 국제 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타키투스의 함정Tacitus trap과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 이론이 자주 언급된다. 전자는 로마 집정관이었던 타키투스가 그의 저서에서 '황제가 백성들로부터 한 번 신뢰를 잃으면 그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증오의 대상이 된다'라고 적은 데서 기인한 이론이다. 후자의 경우는 아테네의 장군 투키디데스가 신흥 강대국 아테네와 기존 패권국인 스파르타와의 무력 충돌을 기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30년 동안 전쟁을 치른 후 두 나라 모두 멸망해 다시는 세계사에 명함을 내밀지 못한 사례를 들어, 두 강대국이 강대강으로 대치하게 되면 모두 공멸한다는 이론이다. 결국 타키투스의 함정은 신뢰의 중요성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힘이나 감정을 앞세운 무력충돌의 위험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소 생뚱맞을지 모르겠지만 이는 혼인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부부간의 불화는 신뢰의 상실에서 시작된다. 그 후부터는 어떤 선의를 가져도, 또한 어떤 호의를 베풀어도 불신이 가중되고 증폭될 따름이다. 그런 악순환의 과정이 지속되면서 점차 서로의 감정이 대치하는 국면으로 전환되고 결국에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이들 함정에 빠졌던 것 같다.


 내가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란 뜻의 '선악善惡이 개오사皆吾師'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중학교 한문 수업 때였다. 좋은 것을 보면 따라 하고 나쁜 것은 배척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므로 둘 다 스승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었다. 진작부터 좋은 말인 줄은 알았지만 나는 살면서 오히려 그 반대의 마음을 가졌던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내 인격이 그 뜻을 담아낼 정도로 수양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풍파를 겪고 나이를 먹다 보니 이제 그 말의 심오함을 조금 알 것 같다. 무엇보다 첫 결혼의 실패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은 남은 삶의 가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이처럼 상대를 남들과의 '비교 대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고 과거의 미흡함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다시 한 번 타키투스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질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아닐까 싶다.


 한 부부가 인연을 맺었다가 헤어지는 과정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과, 얼마나 많은 오해와,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었겠는가. 심지어 영혼이 파괴되는 고통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혹시 지금 당신도 그런 아픔을 겪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많이 아프다는 이유로 당신의 삶을 잠시 정지시킬 수 있는 유예의 혜택은 없다. 흘러가는 시간에는 동정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이 무심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당신의 삶에는 남은 시간이 많다. '인생'이란 무슨 짓을 해서든 기필코 그것을 메워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고들 말하는 것이다. 이제 아픔을 접고 잠시 뒤를 되돌아보라. 그러면 버려야 할 것도 있고 간직해야 할 것도 있으며 채워야 할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행복을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더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당신에게 미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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