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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Mar 27. 2022

내 인생의 보물

행복의 조건에 대하여

 “아직도 휴대폰에 내 이름 그대로예요?”


 늘 밝던 아내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밖에서 뭐든 잘 잃어버리는 나는 집에 들어오면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편이다. 그렇게 나뒹구는 내 휴대폰 속에서 아내는 자신이 이름 석 자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하는지 여태 지켜본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응수하려다가 아무래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아 비굴한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맞다. 그때 내 휴대폰 속의 아내는 그녀 이름 석 자로 저장되어 있었다. 3년 전쯤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저장해 놓은 그대로였다. 우리는 그로부터 약 2년 정도 지나 함께 살기로 약속한 재혼 부부다.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바꾸는 기기 조작을 할 줄 몰랐다. 내가 아무리 60대라 하더라도 그게 엄두도 못 낼 만큼 어려운 ‘기술’이 아닌 줄은 안다. 그러나 굳이 그럴 일이 없어서 여태껏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해보지 않아서 못하는 것이다. 가끔 친구나 선후배의 휴대폰에 자신의 아내를 의미심장한 형용사로 수식하여 저장해 놓은 것을 곁눈질로 보기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싶었지만 귀찮기도 하고 왠지 오글거리기도 해서 마음을 접은 게 화근이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아내에게, ‘여보如寶’는 ‘보석과 같은 사람’이란 뜻이라고 말한 다음날부터 아내 휴대폰 속에서 나는 ‘소중한 여보’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3년 전 나는 어느주차장에서 주차관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마주치는 여성 고객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대뜸 “혹시 혼자 사시지 않으세요?”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홀아비 티를 안 내려고 딴에는 애를 쓰고 살았는데 대체 내 몰골이 어떻길래 안면만 알고 지내는 사람이 대놓고 이러나 싶었던 것이다. 다 알고 물어보는 것도 같고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어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분은 뜻밖에도 ‘참한 언니’를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혼 후 20년 가까이 혼자 살아온 처지에 마음이야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몇 번에 걸쳐 그 호의를 거절했다. 나이 60줄에 사람을 만난다는 게 어디 마음만으로 될 일인가. 오랜 세월 혼자 살아온 관성이 이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증폭시킨 면도 있지만 사실은 내 ‘처지’가 문제였다. 이 나이 되도록 아직 집도 한 칸 없이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여자 앞에 나선다는 말인가. 그때 나는 집은 고사하고 흔해 빠진 고물차도 한 대 없는 한심한 주제였다. 사업에 실패한 이후 재기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좀처럼 형편이 나아질 기미는 없었다.


 몇 번의 제의에도 내가 계속 거절하자 그분은, “아니, 한 번 만나보고 마음에 안 들면 그만 두면 되지 미리부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라며 나무랐다. 아무래도 최후통첩인 것 같았다. 내 처지 때문에 그러니 양해해 달라는 말은 자존심 때문에 기어이 하지 못했다. 왠지 그분의 마지막 말 뒤에, ‘쥐뿔도 없는 게!’라는 말이 생략되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그분의 호의에 한 번 호응하는 정도의 의례적인 만남만을 생각하고 약속 날짜를 잡았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나는 사돈 내외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그 자리에는 헤어진 전처도 동석했다.


 “어차피 한 번은 방문하셔야 될 거 한 번에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작년에 결혼한 큰딸과 사위가 해외에서 살고 있었는데 같이 방문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돈끼리의 여행이 부담스러운 건 차치하더라도 전처의 생각이 어떤지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헤어지긴 했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 혼자 살고 있었다. 큰딸의 혼사 문제로 가끔 만나기는 했지만 아무리 사돈끼리라 해도 함께 해외여행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이들 엄마 역시 ‘좋다’고 해서 몇 달 후쯤 출국하기로 일정이 잡힌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리자 반응은 양분되었다. 전처의 뜻이 그냥 딸과 사위를 보러 가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의견과, 사람이 싫으면 절대 그렇게 동의할 수 없으므로 재결합을 생각해보라는 의견으로 나뉜 것이다. 결혼에 앞서 시어른 될 분들에게 부모의 이혼 사실을 어떻게 밝혀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던 큰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또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작은딸과 막내아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부터 나는 전처와의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얼마 후에 애들 엄마와 같이 유럽 여행을 떠날 예정입니다.”

   

 그분의 ‘참한 언니’는 사별 후 딸 한 명을 키우며 혼자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녀와 처음 인사한 자리에서 내가 대뜸 그렇게 내뱉은 것이다. 거기에다 자식들을 생각해 전처와의 재결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까지 씨부렸다. 지금 내 상황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도도 있었다. 어차피 계속 만날 의사가 없으니 초면에 함부로 지껄이는 ‘웃기는 인간’이 되면 금방 포기할 것 같은 배짱이 발동한 것이다. 그런데 ‘참한 언니’는 내게 뜻밖의 질문을 했다.


 “자식들 때문에 재결합을 생각하는 건가요? 본인이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고요?”


 나는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당황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재결합은 추측에 근거한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앞선 때문이지 내 행복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이들의 행복이 내 행복과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행복을 추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 해도 그것은 나 자신을 중심에 둔 깊이 있는 성찰과 고민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재결합 문제에 대한 고민의 본질은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참한 언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맑았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이 아무리 고상하다 해도 이 나이 때의 남녀 간 만남은 결국 현실적인 문제로 귀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그녀와 헤어질 때쯤 예의 상 전화번호를 물었다. 거절한다 해도 흔들리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단단히 동여맨 상태에서 던진 물음이었다. 이 정도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소개해준 그분에 대한 예의도 지킨 것 같고 구질구질한 내 처지가 더 드러날 것도 없으니 여기까지가 딱 맞다 싶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참한 언니’는 순순히 번호를 알려줬다. 내 작전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첫 만남 이후에 내게 가끔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답신을 보내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때로는 아예 대꾸도 하지 않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계속 만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분노하지도 않았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이 짓 저짓 다 해 봐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으니 배짱이 고만고만한 나도 계속 그 짓을 할 수 없었다. ‘정 떼려는 작전’이 조금씩 차질을 빚어 가고 있었다. 저지른 짓이 미안해서 밥 먹고 차 마시는 동안 차츰 그녀의 내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때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처지에 관련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기 싫어 어설픈 잔머리를 굴렸지만 할 수 없이 내 처지를 자백했다. 나는 열 평도 안 되는 임대아파트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게다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자식들이 아직 둘이나 더 남아 있다고, 그래서 여자와 함께 살 형편이 못 된다고. 그녀는 굵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남자의 몸으로 혼자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매일 빚쟁이 돈 받으러 오듯이 꼬박꼬박 찾아오는 끼니를 스스로 해결하는 게 그렇고 허기와 함께 몰려오는 외로운 밤을 견뎌내는 것 또한 그랬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린 자식들 부둥켜안고 홀로 번민하던 밤은 암담했고, 사업체를 빼앗기고 피눈물 흘리며 대륙을 떠돌던 세월은 참담했다. 고맙게도 부족한 아비 아래서 잡초처럼 잘 견뎌내고 제 앞가림하기 위해 세상 밖으로 떠나는 자식들 배웅하고 돌아서니 나도 어느덧 60줄에 접어들었다. 나는 남자여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여자’가 그리웠다. 그러나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행복해질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나마 가능성이라도 타진하려면 어쨌든 만나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것은 마치 꽝이 되더라도 복권을 사야 로또 맞을 기대라도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문제는 복권은 오천 원만 있으면 되지만 이건 오백이나 오천으로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나는 그 대열에 동참할 최소한의 조건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보이기만 할 뿐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무지개와 같았다. 그렇게 내 마음이 어수선할 때 그녀를 만났다. 그녀와 나는 서로 행복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었다.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나는 ‘처지’라 생각한 반면 그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열 평도 안 되는 임대아파트면 어떻고 돈이 없으면 어때요? 욕심 내지 않고 형편에 맞춰 살면 되잖아요. 아무리 돈 많고 대궐 같은 집에 살아도 서로 마음이 안 맞으면 무슨 소용인가요? 부부가 왜 문제가 없겠어요. 그러나 저는 사람만 올바르면 어떤 문제라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어떤 여자 귀신이 내 앞에서 씨나락 까먹고 있는 줄 알았다. 동시에 돈이 없어도 사람만 괜찮으면 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귀신이 내 여자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날 그녀의 얼굴에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심이 보였다. 그러나 여행을 다녀온 후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 재결합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 끊임없이 내 마음을 탐색한 후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나를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해 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녀의 남자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열 평이 채 안 되는 임대아파트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너 로또 맞았다.”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데다 사람을 대하는 아내의 언행을 유심히 지켜본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그렇다. 그녀는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을 선택한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마저도 올바른 마음을 가지도록 만드는 지혜로운 여자였다. 사소한 일에도 항상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 언제나 나를 지지하는 그녀와의 삶이 내게는 ‘구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 그녀는 어두웠던 내 인생을 밝히는 환한 등불이 되고 있다. 오천은커녕 오백 원조차도 들지 않고 로또를 맞게 해 준 그분이 고맙다. 내가 어떤 연유로 그분에게 점지되어 ‘참한 언니’를 소개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무슨 일이든 불편한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 아내의 얼굴이 이번에는 다음날 아침까지도 펴지지 않았다. 아내가 출근하고 난 후 나는 만사 제쳐놓고 휴대폰을 거머쥐었다. 이것저것 꾹꾹 누르며 한참 미로를 헤매다가 겨우 저장된 이름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과연 엄두도 못 낼 만큼의 기술까지는 필요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퇴근한 아내의 동태를 희끗희끗 살폈지만 애가 탔다. 아내 눈에 잘 띄는 곳에 일부러 휴대폰을 '방치'해 두었지만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휴대폰을 집어 든 아내의 모습이 내 곁눈질에 포착되었다. 아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내 휴대폰에 저장되었던 아내의 이름 석 자는 ‘내 인생의 보물’로 변경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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