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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Aug 02. 2022

나영이와 재준이

사랑의 정원은 그리는 게 아니라 가꾸는 것

 “아이고, 어젯밤 열한 시에 애한테서 카톡 온 것도 모르고 잤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아침에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든 아내는 요사이 잠귀가 많이 어두워졌다며 자신을 타박했다. 그러나 아이한테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하는 걱정 묻은 표정으로 출근했다. 나영이는 이제 막 20대 중반에 접어든 아내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아내의 좋은 점을 많이 닮은 나영이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자립심이 강한 아이다. 무엇보다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대인관계가 원만한 아이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좋은 점도 많이 닮았을 것이다.


 “나영이가 어제 승급 했다네요. 그 소식을 전하려고 메시지를 날렸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쿨쿨 자고 있었으니...... 많이 울었나 봐요.”


 출근해서 나영이와 연락이 된 아내의 전화였다. 나영이는 대기업에서 영위하고 있는 네트워크 마케팅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전날 성과에 따라 부여되는 직급이 상향 조정된 모양이다. 일반 직장으로 따지면 승진이 된 셈이다. 나는 나영이와 함께 살고 있지는 않지만 아이가 움직이는 동선은 대략 알고 있다. 모녀간의 소통이 원활하고 그 정보가 아내를 통해 내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영이가 매우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곧바로 나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영아, 엄마한테 소식 들었다. 축하한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참 잘했다.”


 “다 아저씨 덕분이에요. 두 분이서 잘 살아주시니까 제가 맘 놓고 일을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만약 엄마가 힘들게 사시면 신경이 쓰여서 제가 어떻게 일에 집중할 수 있겠어요.”


 또래답지 않은 속 깊은 대답이었다.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 이번에는 재준이가 최상위 레벨의 직급 군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재준이는 나영이의 남자친구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둘은 내년에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한 가족처럼 잘 지내고 있다. 나영이보다 나이가 제법 더 많은 재준이는 속이 단단하고 건실해서 믿음직스러운 젊은이다. 작년 내 생일 때에는 경주에 있는 호텔에 묵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우리 부부를 생각하는 마음도 남다르다. 재준이에게도 축하 전화를 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제가 앞으로 열심히 해서 두 분께 더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준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더 잘할 거 없다. 지금까지 해준 것만도 고맙다’ 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재준이는 이번 직급에 도달한 후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살아생전 어머님께 효도하지 못했다는 회한과, 이 직급에 도달하기까지 남몰래 흘렸을 땀방울이 한데 뒤섞여 진한 눈물로 변환되었을 것이다. 나영이가 자기 엄마와 잘 지내준 덕분이라며 내게 고마움을 표시한 것처럼 나는 재준이가 고마웠다. 딸과 사이좋게 지내는 예비사위 덕분에 아내의 마음은 평화로웠을 것이고 그 평화의 최종 수혜자는 바로 나였을 터니. 어쨌든 그날 내 뇌리에는 재준이가 나를 향해 부른 ‘아버님’이란 호칭이 오래 남았다. 재준이는 나를 늘 그렇게 부른다.


 현재 우리 상황은 이렇다. 내 아내의 딸은 내게 ‘아저씨’라 부르고 그 딸의 남자친구는 나를 보고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아내와 나는 서로 ‘여보’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들으면 무슨 개 족보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작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눈치 챈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내와 나영이 사이에 뭔가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고 그것이 나에 대한 호칭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나영이가 내게 ‘아빠’라고 부르길 원했고 나영이는 난색을 표시한 것 같다.


 올봄 아내가 분홍색 꽃이 피는 제라늄 화분을 집으로 들고 왔다. 아내 가게에 있는 제라늄의 가지 하나를 꺾어 화분에 심어 키우다가 꽃이 피기 시작하자 가져온 것이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생전에 꽃을 좋아했다는 말을 들은 데다, 등산이나 산책을 하면서 꽃을 대하는 내 언행을 보고 나도 어머니를 닮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작은 꽃 하나가 공간을 채우자 내 일상에도 미세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탁자 위의 제라늄은 마치 내가 깨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밝게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날은 환하게, 또 어떤 날은 배시시,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아직 돌 지나지 않은 외손자처럼 어설프게 손뼉 치며 까르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아침이 어떻게 굿모닝이 아닐 수 있겠는가. 당시 햇볕을 좋아하는 제라늄이 종일 베란다에 있다가 밤이 되면 슬며시 침대 옆의 탁자로 옮겨진 것은 아침을 맞이하는 이런 내 느낌을 눈치 챈 아내의 수고였다. 나는 가끔 녀석의 연하디 연한 작은 꽃잎에 입맞춤하기도 하고 행여 잎이 떨어질새라 조심스럽게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면 왠지 녀석이 몸을 꿈틀거리며 좋아하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좋았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가게에 있는 꽃은 한 번 지고 나면 내년 봄에나 다시 피는데.”


 어느 날 꽃을 보던 아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매년 제라늄 꽃잎의 명멸을 지켜봐왔던 아내가 꽃이 졌다가 그 자리에 다시 피는 것은 처음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이 사랑을 흠뻑 주니까 꽃도 그걸 아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꽃은 다시 한 번 더 졌다가 피었다. 내 생일날 아내는 화분 한 개를 더 가져왔다. 이번에는 꽃은 없고 잎만 무성한 바질이었다. 나는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마치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서는 느낌이어서 좋았다. 햇빛을 좋아하지만 물은 사나흘에 한 번 주면 충분한 제라늄과, 그늘을 좋아하고 물은 아침저녁으로 마셔야 하는 바질은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나는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물을 주고 위치를 옮기며 정성을 쏟았다. 그러는 사이에 제라늄은 꽃이 피었다 지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바질의 향내는 더 짙어갔다. 내가 주는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아빠’라는 호칭을 나영이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나영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빠가 돌아가셨지만 그 전에도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던 모양이다. 아이에게서 너무 빨리 사라져버린 ‘아빠’라는 단어는 아직도 나영이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라는 말은 웃으면서 부르거나 달려와 품에 안기면서 불러야 제 맛이 나는 어휘다. 그러므로 지금은 나영이의 입에서 쉽게 뿜어져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또한 ‘아빠’는 사랑이 쌓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이 세상의 아빠들이 단지 ‘아빠’라는 말을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랑을 아이에게 주었겠는가. 그러므로 나영이에게 나는 ‘아빠’가 아니라 지금처럼 ‘아저씨’가 맞다. 나영이에게 아무것도 준 게 없는데 단지 엄마의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어떻게 나영이의 ‘아빠’가 될 것인가.


 아내는 혼자 살면서도 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고 했다. 나영이 아빠가 일찍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만 짧았던 결혼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나를 만난 후 자신의 마음속에 가족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는 아름다운 정원을 그렸던 것 같다. 아마 그 꿈의 일환으로 나영이가 내게 ‘아빠’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사랑이 가득한 가정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것이다. 지금 베란다에 나가 있는 저 제라늄이나 바질에게 물을 주고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는 것처럼. 그래서 지금 해야 할 일은 일찍 아빠를 여읜 나영이에게는 아빠의 마음을 주고, 일찍 엄마를 떠나보낸 재준이에게는 엄마의 따뜻한 손길을 주는 것이다. 아내와 내가 말이다. 그렇게 해서 사랑이 차곡차곡 쌓이면 나영이도 언젠가는 내게 ‘아빠’라고 할지도 모른다.

 며칠 전 나영이와 재준이가 승급 기념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사줬다. 게다가 선물꾸러미도 한 보따리 풀었다. 돈 벌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기특하고 고마웠다. 나영이와 재준이는 사랑 받기에 충분한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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