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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Apr 09. 2022

한 아버지, 두 어머니

연적의 자식을 품은 여인, 연적에게 자식을 맡긴 여인

 1972년 초 내가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한겨울의 북풍한설은 그쳤다 해도 한촌閑村의 골바람이 아직은 찰 때였다. 겨울 끝자락에 빌붙어 있는 여풍餘風의 찌꺼기에 호롱불의 불꽃 허리가 민망하게 흔들리던 그날 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달빛이 들썩이는 어머니의 어깨를 비추었다. 잠결에 우연히 본 것인지 어머니의 흐느낌에 내가 잠을 깼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날 나는 대낮부터 들떠 있었고 어머니는 종일 가라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내가 전학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도회지로 나간다는 것이 좋기만 했던 나와 달리, 어머니에게는 그 이별이 남다른 아픔이었음을 안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난 후였다.


 그렇게 나는 도시로 나와 큰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어머니’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 게 되는 존재지만 ‘큰’어머니는 달랐다. 그 의미를 스스로 알아내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고 누가 가르쳐주기에는 어른들이 민망한 일이었다. 내가 ‘큰어머니’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서자 신분 때문에 호부 호형하지 못하고 집 떠나는 홍길동의 처지가 나와 같다는 생각을 한 기억이 있으니 아마 중학생 때쯤이었을 것이다.


 사춘기 아이가 미묘하고 어색한 가족 관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파악해가는 과정은 애달픈 일이었다. 친구 집에서 가끔씩 보는 사모관대와 족두리 쓴 부모님의 빛바랜 혼례 사진을 내 집에서는 본 적 없고, 아버지 같은 형님과 어머니 같은 누님의 존재가 의아스러워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아이가 홀로 수학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지성에 물을 주는 일이지만, 출생의 비밀에 대한 실마리를 스스로 풀어내는 것은 사춘기의 감성에 불을 지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청소년기를 맞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부산 용두산 공원 근처의 어느 철공소에서 ‘시다바리’ 일을 하고 있었다. 집 떠나는 홍길동을 흉내 낸 가출이었지만 내가 도착한 곳은 율도국이 아니라 철공소였다. 아버지의 지갑에서 훔친 돈이 다 떨어져 배회하던 중 밥 먹여준다는 말에 덥석 취직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어설픈 직장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떻게 안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온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아버지가 나를 ‘잡으러’ 왔는지 ‘데리러’ 왔는지 분간이 안 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지갑을 도둑질한 짓을 상기하면 ‘잡으러’ 온 것 같고, 밤마다 밀려오는 가족의 그리움을 떠올리면 ‘데리러’ 온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의 낮고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가자”


 내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가출 행각은 끝났지만 나는 점점 집안의 문제아가 되어 갔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가 하면 싸움박질까지 하며 거칠어져 갔다. 고등학교 상급반이었는지 20대 초반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향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붙들고 통곡했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어머니의 말이 내 뇌리에 꽂혔다.


  “멀쩡한 애를 도둑놈으로 만들어 놓고.......”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어머니가 황급히 다녀간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큰어머니 방에서 흘러나온 어머니의 흐릿한 목소리도 돌연 생각났다.


 “죄송합니다. 형님.”


 ‘형님’은 어머니가 큰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탐문 끝에 사건의 전모를 알아냈다. 큰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패물이 없어졌는데 평소 행실이 좋지 않던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어머니를 호출한 것이다. 나를 족쳐봐야 소용없을 터니 어머니를 통해 패물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던 중 잃었던 패물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즈음에 마침 내가 나타나니 어머니는 설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손가락 곱아 보면 그때 어머니의 나이 겨우 마흔 중반, 내가 환갑 나이가 된 지금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어린 가슴에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그 사건은 나 자신을 각성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모든 게 내 행실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자각한 것이다.


 늘 조아렸던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가녀린 음성과 내리깐 눈동자,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아직도 조아리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결혼하자마자 6.25에 참전했던 남편이 전사해 홀로 된 어머니를 거두었다는 풍문을 얼핏 듣기는 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어머니는 이십 대의 꽃다운 나이 때부터 사람들의 눈총을 감내해야 하는 민망하고 궁색한 위치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그 여린 심성에 큰어머니와 이복형님 누님들과의 첫 대면을 어떻게 감당했을까를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그런 어머니의 입장도 모르고 분탕질하며 돌아다녔던 나는 천하의 불효자식이었던 셈이다.


 이제는 내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세 분 모두 돌아가셨다. 나란히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곤 하던 세 분의 말년 모습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는지 세월이 흐르고서야 깨달았다. 무엇보다 큰어머니에게 감사하다. 남편이 바깥에서 낳은 자식들을 품고 살아야 했던 운명을 오롯이 받아들인 그분께 감사와 함께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문안 차 병원에 들렀을 때 마지막임을 감지한 듯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나는 병실을 나와 문을 등지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또한 우리 형제들에게 단 한 번도 멸시의 눈길을 보내지 않고 선하게 대해 주신 이복형님과 누님들의 너른 마음도 잊을 수 없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봉분 앞에 엎드려 울었고 아버지는 묵묵히 봉분을 쓰다듬었다. 50여 년 전 그날, 어린 자식을 품에서 떼어 연적에게 보내야 했던 한 여인의 아픔과, 남편의 마음을 뺏은 연적의 자식을 품어야 했던 또 다른 여인의 아픔을 모두 씻은 것은 세월이다.


 큰어머니 사후 아버지는 어머니와 혼인신고 함으로써 어머니에게 법률적으로도 책임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슬하의 자식 모두 적서嫡庶 차별 없이 똑같이 공부를 시켰으니 강한 책임감을 가진 가장이었다. 비록 규범의 울타리를 타넘은 행위였지만 자신이 낳은 자식들과 품었던 여인들에 대해 남자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아버지에게도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드린다. 내가 어리석기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인가 보다. 아버지의 이토록 강한 책임감과, 큰어머니의 그토록 드넓은 포용심과, 어머니의 끝 모를 인내심을 보고 컸으면서도 아직까지 이렇게 속 좁고 다급한 필부로 살아가고 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두고 불륜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이라고 할 것인가. 또한 아버지를 두고 중혼重婚의 죄를 범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가속家屬의 삶을 끝까지 책임진 훌륭한 가장이었다고 할 것인가. 큰어머니의 삶을 가해한 사람은 누구이며 내 사춘기의 감성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또 누구인가. 나는 여전히 호부 호형하지 못하는 서출庶出의 신세인가 아니면 두 분의 혼인신고에 의해 속량 된 적자嫡子의 신분인가. 세월에 따라, 보는 이에 따라 구구한 말들을 쏟아낼 것이다. 그러나 이든 저든 이제는 모든 업장業障이 소멸된 세 분의 과거지사過去之事이니 부질없는 물음이다. 그저 시대의 습속習俗이었다고 뭉뚱그릴 뿐이다. 그러나 나는 세 분 모두가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생이 다할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가던 길을 끝까지 갔기 때문이다. 또한 세 사람의 삶이 머물렀던 구간에 책임과 포용과 인내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들의 삶도 한낱 질펀한 유희의 인생으로 낙인 되었을 것이다. 사랑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했던 사람 치고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폭풍우 속에서도 각자가 만든 책임과 포용과 인내의 고리를 엮어 끝까지 버텨냈다면 비록 남 보기는 흉했을지언정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한 것이다. 세 분 중 가장 늦게 돌아가신 어머니도 생전에 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 감사하고 행복한 삶이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많은 것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게 아니라 책임과 포용과 인내의 고리로 서로를 단단히 동여매는 일인 것 같다. 사랑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새겨봐야 할 말이다. 꼭 내 아버지와 두 어머니의 일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스산하고 산하 또한 붉게 물들기 시작했으니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비에 흠뻑 젖어 썩어가는 고향 뒷동산의 낙엽 냄새가 그립다. 또한 빗방울에 튀어 피어나는 고향집 앞마당의 흙냄새도 그립다. 조만간 산소에 들러 세 분께 큰절이나 올리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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