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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Feb 02. 2023

3狂 1無 1有, 그리고 파친코

 1월이 끝나갈 즈음 느닷없이 <3광 1무 1유>라는 이상한 제목이 달린 기사가 도하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했다. 한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간 유럽의 어느 기자가 자신이 본 한국인들의 모습을 평가한 글이었다. 의문스러운 제목에 이끌려 관련 기사를 읽어봤다. 한국인들은 세 가지에 미쳐 있고 한 가지는 빠져 있으며 오직 한 가지만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1狂- 스마트폰

 그는 제일 먼저 우리나라의 지하철 광경을 예로 들며 한국 사람들은 스마폰에 빠져 있다고 했다. 심지어 식탁에서조차도 구성원들끼리 제각각 스마트 폰만 쳐다보고 있을 뿐 가족 간의 대화는 거의 없다고 꼬집었다. 이에 반해 일본과 유럽의 지하철 풍경은 독서가 대세라며 휴대폰을 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한마디로 스마트폰에 '미친 종자'들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쪽 나라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해 지하철에서 그들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고 있는지, 또한 집에서 가족들끼리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장 떠오르는 우리나라 지하철의 모습을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2狂- 공짜

 정확하게는 '공짜 돈'에 미쳐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코로나 사태를 맞아 재난지원금 지급을 두고 오간 정치권의 공방과 그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있는 국민들의 모습을 빗대어 한 말이 아닌가 싶다. 그는 곳간 새는 줄도 모르고 무조건 공짜 돈을 바라고 있는 듯한 국민성을 꼬집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것을 포퓰리즘의 전형으로 보고 우리 정치권의 행태를 비난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좀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뇌물'이라는 말도 '공짜 돈'의 범주에 넣고, 우리나라를 부정 부패가 만연하고 상식에 벗어나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묘사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지나치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 또한 무조건 틀렸다고 하기에는 뒷골이 좀 당긴다. 나만 해도 공짜로 주는 돈이 그리 싫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3狂- 트롯트

 그리고 나라 전체가 '트롯트' 광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집에 TV도 없고 그 방면에 큰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런 분위기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한다. 국외자局外者인 내게까지 그런 분위기가 심심찮게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확실히 대부분의 방송 채널에는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거의 비슷비슷한 트롯트 경연 프로그램이 즐비하다. 시청자들이 호응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니 그 유럽 기자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전 국민이 트롯트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또한 그가 헛다리짚었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1無1有- '생각'은 없고 '말'만 있다.

 또 그는 한국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악담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진지함이 없고 그 결과 각종 대형사고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해석했다. 성수대교에 삼풍백화점이니 세월호니 하다가 최근 이태원 참사까지 겪은 우리로서는 뼈 아픈 대목이다. 이에 더해 '일본인은 생각하고 난 후에 뛰고, 중국인들은 일단 뛰고 난 뒤에 생각하며, 미국인들은 뛰면서 생각하는데 한국인들은 자신이 왜 뛰는지도 모르고 뛴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NATO(No Action Talking Only) 족族이라고 끝맺으며 악의를 감추지 않았다.


 이에 도하 언론과 사회평론가들은 일제히 이에 대한 평가를 잇대었다. 다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체로 우려하는 마음으로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반성과 함께 이를 극복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조도 더러 보였다. 심지어는 찬란했던 로마 문명의 멸망 원인이 '포도주의 쾌락과 공짜 빵, 그리고 서커스'라며, 그가 지적한 내용과의 유사성을 들어 나라의 존망까지 걱정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그리고 '파친코'

 '파친코'는 1.5세 재미교포인 미국 국적의 이민진 작가가 쓴 소설이다. 출판되자마자 미국에서 시작된 호평이 점차 전 세계로 퍼져나가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로 제작되어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나는 소설로만 접했다.

 '파친코'의 제일 첫 문장은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이다. 이는 시대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질곡의 삶을 헤쳐나가는 재일조선인들의 정신 세계를 한 마디로 함축한 주제 문장이다. 모호한 정체성을 짊어지고 거칠게 몰아치는 역사의 파도를 뚫으며 조금씩 전진하는 한민족의 강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자이니치在日'라는 애매한 이름을 붙였다. 이 소설의 집필 기간은 30여 년이었다고 한다. 또한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수천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 후속작으로 가칭 'American Hagwon 아메리칸 학원'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교육열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런 그녀를 보고 누군가가 "왜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계속 쓰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이런 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내게는 민족적 자긍심이 담긴 대답처럼 들렸다.


 그 유럽 기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한국에서 근무했는지, 또한 어느 언론에서 어떤 일에 종사했는지, 심지어는 그의 성별이나 나이 같은 기본적인 신상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막연히 그의 모습을 추정할 뿐이다. 따라서 그가 얼마나 깊이 한국과 한국인을 관찰하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한 후에 그런 글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는 이 강인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수천명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30년의 시간을 고민하며 3천여 매에 달하는 원고지 위에 글을 옮긴 사람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를 두고 어느 것이, 혹은 누가 옳느냐의 문제로 접근하면 답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깊이 있는 고찰인가의 문제로 인식하면 답은 자명하다. 유럽 기자는 얕고 미국 작가가 깊은 것이다.

 

 책 속에는 스마트폰이 없지만 스마트폰 속에는 책이 있다. 그러니 지하철에서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는 그의 말은 잘못된 말이다. 사실은 책도 보고 영어공부도 하며 영화도 보는 것이다. 물론 유럽이나 일본 지하철에서 책 안 보고 잠 자는 사람이 있듯이 우리 지하철에도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책만으로 한 나라의 국민을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

 '공짜 돈'도 그렇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나도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배짱이처럼 허구한 날 드러누워 손만 벌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코로나가 덮친 세상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 좀 기대했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모진 말 쏟아낼 일은 아닐 성싶다. 또 우리만 그랬던 것도 아니잖은가.

 '트롯트'는 또 어떤가. 저희 나라 사람들 축구에 미쳐 난동질 하고 미국 사람들 일 년 내내 야구 잔치하는 건 괜찮고, 우리가 뽕짝 리듬에 어깨 좀 들썩였기로서니 그게 그렇게까지 악담할 일인가. 예로부터 우리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기도 하고 '동방예의지국'이기도 하지만 음주가무의 DNA가 유별난 민족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구려 벽화 속에서 흥겹게 춤 추고 있는 여인들의 자손이다. 어찌 삼바는 세계적인 축제라 칭송하고 트롯트는 미쳤다고 함부로 망발하는가. 오히려 벌거벗고 흔들어대는 삼바 리듬에 비하면 뽕짝은 양반이다.


 언뜻 보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는 그저 악담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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