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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화신 Oct 19. 2019

자유와 해방감 아래서의 글쓰기




자유와 해방감 아래서의 글쓰기





이하 사진 출처_ 언스플레쉬



나는 가끔 내가 지금, 글을 왜 쓰고 앉아 있나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나의 이 기특한 자발적 글쓰기는 무엇 덕분에 가능한 일인지를 하릴없이 생각해보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매번 이렇게 결론이 났다.


이 세상에서 내가 거의 유일하게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서.


글쓰기는 내게 해방감을 준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글을 쓸 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맘대로 반죽할 수 있다는 데서 자유를 느낀다. 일차원적으로, 무엇을 쓸 것인지를 고르는 것부터 무슨 단어를 쓸 것인지, 이 단어를 어떤 단어와 붙일 것인지, 문단을 여기서 나눌 것인지 좀 더 가서 나눌 것인지... 그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다.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나 혼자 중에서도 가장 나 혼자 하는 일이어서 그 누구도 내게 감 놔라 배 놔라 지시할 수 없다.


어쩌면 글쓰기의 본질이 자유와 해방감이 아닐까. 예전에 봤던 한 인터뷰에서 가수 한영애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노래는 나를 한 번 털어내는 거예요." 탄성이 연이어 세 번 정도 나왔다. 그래, 나를 툭툭, 그렇게 털어내버리는 것. 그게 노래고 또 그게 글쓰기고 또 그게 모든 자기표현의 예술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나를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글을 써서 나를 털어냈다.


정말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내 안에 들어앉은 어떤 고민, 생각, 분노, 기쁨, 열정 그 모든 무겁고 벅찬 것들을 견디기 힘들어 나는 글로써 그것들을 털어냈다. 내게 딱 달라붙어 있던 것들을 털어낼 때 나도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난 점점 가벼워졌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짓눌렸던 그 무게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몇 개월 전에 동시집을 출간한 가수 겸 연기자 김창완 님의 출간 기자간담회를 취재한 적 있다. 거기서 그가 한 말에 난 조용하게 또한 탄성을 질렀다. 다음은 그때 쓴 기사의 일부다.


'방이봉방방'은 무지개가 뀐 방귀소리다. 어떻게 방귀소리를 책 제목으로 했느냐는 질문에 김창완은 "어쨌거나 아이들에게 해방감을 주는 시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우선이었다"고 답했다.


"저의 글쓰기 자체도 그렇지만, 민망한 사건을 통해서 숨기고 있던 걸 드러낸다는 것은 서로의 경계를 허물 수 있고 소통의 장이 넓어지는 일 같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금지되거나 아이들한테 벽이 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실행을 못했던, 그런 부족함에 대한 걸 썼다. 어른이든 아이든 읽는 분들이 유쾌해지고 해방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 김창완




어른들에게도 방귀는 숨기고 싶은 것이다. EBS 인기방송 <방귀대장 뿡뿡이>에 '전체관람가'라고 적힌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어른들도 이 방송을 보고 유쾌해져도 된다는 의미였다! 억압됐던 방귀 욕망을 방귀대장 뿡뿡이를 보고서 풀고,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라는 그런 말이었다.


글 쓸 때 내가 느끼는 해방감이 앞서 말했듯 단지 일차원적인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단지 주제와 문장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물리적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이상인 것만 같다.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그 내용 측면에서도 맘 속에 있는 억압된 무언가로부터, 혹은 나를 꽉 채우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떨어져 나오게 하는 일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자유다.


나는 하얀 백지 안에서 뛰논다. 울타리 하나 없는 드넓은 초록 들판을 뛰어다니는 길들여지지 않은 말처럼! 정말이지 난 그 자유로운 느낌 하나 때문에 계속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를 조금이라도 가두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해방된 자로서 들판에서 춤추고 싶어서.


그러니 우릴 움직이는 글은 대부분 어둡거나, 분노에 차 있거나, 절망에 빠져 있거나, 슬픔에 절어 있는 것일 테다. 결론이 좀 이상해 보이겠지만 '자유와 해방감'이란 단어를 놓고 들여다봤을 때 이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글쓰기니까. '그것들'은,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기보단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무엇이어야 말이 될 테니까.


문학이 장밋빛 동화일 수 없는 건 쓰는 이와 읽는 이를 이렇듯 해방시켜주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고름을 짜야 고름에서 해방되듯, 분노와 절망을 짜내야 그것들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질 테니까. 화내면서도 나쁜 놈 나오는 책을 보고, 답답해 죽겠으면서도 그런 주인공이 나오는 책을 보는 건 내 안에 그것과 똑같은 악함과 답답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치며, 나는 홀가분을 느낀다. 내 머릿속에 맴돌던 이 생각들을 내가 고른 활자들로 털어내고 나니까 속이 가볍다. 또 조금이라도 무거워지면 나는 언제든 노트북을 열 거다. 자유는 언제나 내 목적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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