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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Oct 25. 2018

점심

2018.10.25

직장인들에게 점심메뉴 선정은 어쩌면 업무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내내 허기져있던 배를 좋은 영양분으로 가득 채워 오후와 저녁을 버틸 체력을 비축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날씬하고 키 큰 언니와 남동생,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작고 토실토실한 체형이었던 나는 유달리 체형에 관한 짓궂은 소리를 들어가며 자라온 탓인지 입맛도 까다롭지 않고, 식탐도 별로 없었다. 맛집이나 미식가 같은 것과는 절대적으로 거리가 멀다 보니 어딜 가서 뭘 먹어도 맛이 없다거나, 특별히 맛있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다. 이러한 입맛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아주 매운 음식이나 알레르기로 못 먹는 음식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은 나에게 있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점심메뉴가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나 혼자 밥 먹을 먹는 것이 아닌 팀원들과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개개인마다 각기 다른 입맛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물론 가격과 거리 등등 고려해야 할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신입사원에게 '점심 뭐 먹으면 좋을까'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굉장히 곤란한 질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기획팀에 신입직원을 뽑아 출근하게 되었는데, 상사가 신입에게 "점심을 뭘 먹으면 잘 먹었다는 소릴 들을 수 있을까요"라며 질문을 던진 것이다. 회사 근처에 어떤 식당이 있는지도 모르고, 무슨 메뉴를 파는지도 모르는 신입에게 지금 저 질문이 합당한 걸까 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특별히 바라는 대답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적당히 한식 중식 양식 이런 것 중 흔한 메뉴를 한두 가지 대답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상사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칼국수는 밀가루라서, 부대찌개는 매워서, 돈가스는 느끼할 것 같아서... 이름을 대는 족족 그 메뉴가 싫은 이유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대체 저 질문을 한 의도가 무엇일까. 말 그대로 '답정너'였을까. 신입이 회사 주변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질문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으레 던져본 질문이라고 하기엔 상사의 반응은 냉랭함을 넘어 화를 내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답답한 공기가 사무실을 메웠던 그날, 나는 지도 하나를 만들었다. 이름하야 '점심! 여기서 먹으면 실패하지 않는다!'라는 이름의 맛집 지도였다. 맛집이라고 하기엔 내가 가서 먹어본 식당이 전부였지만, 종류는 결코 적지 않았다. 나름대로 양식, 한식, 중식, 일식으로 장르를 구분해 지도에 표시했다. 훗날 어떤 신입사원이 같은 질문을 받아 난감해하는 상황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동역 ~ 서울남부지방법원 라인의 그래도 괜찮은 식당들.

식사에 대한 개개인의 호불호는 생각보다 디테일하게 들어간다. '어제저녁으로 밀가루를 먹었더니 오늘 점심은 밀가루가 싫다' 라던가, '이따 밤에 고기를 먹어야 해서 점심은 아주 간단하게 먹자' 라던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오랜만에 밥을 먹고 싶다' 라던가. 각자가 놓인 상황이 다른 만큼 점심 메뉴를 선정하는 사람의 입장 또한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참 편한 상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씨구나 자화자찬) 좀 축소해서 말하자면 최소한 점심메뉴를 고르는 데 있어서 까다롭지 않은 상사 정도랄까. 질문은 늘 똑같이 시작한다. "오늘은 뭘 먹을까요?" 내 질문에 팀원들은 먹고 싶은 이런저런 메뉴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오랜만에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하고, 누군가는 제육볶음을 먹고 싶다고 한다. 이러저러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중에 마침 내가 먹고 싶은 메뉴가 있다면 "그거 괜찮네!"라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자신이 언급한 메뉴를 먹지 못한 팀원에게는 "그 메뉴는 내일 점심으로 콜!"을 외치는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점심 메뉴를 한 번에 고르는, 너무나도 편리한 점심메뉴 선택인 것이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면 배가 부르다. 뭐든 먹고 나면 배가 부르다. 점심시간의 햇빛이란 춘곤증이나 천고마비의 계절 따위에는 아랑곳 않고 나를 졸음의 세계로 가뿐히 인도한다. 그래, 배부르고 등 따시면 졸리다고 했던 옛 어른들의 말이 있었지, 라며 되지도 않는 말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런 말이 있을 리 없다!!) 누구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고, 누구 하나 먹고 싶은 메뉴를 먹지 못해 억울해하지 않는 그런 평화로운 점심, 점심시간. 나는 지금의 점심시간이 너무 좋다. 


그러니 제발 클라이언트님들, 오후 1시 언저리에 미팅 약속 잡지 말아 주세요. 당신네들 같은 '갑'들은 밥 먹고 커피 한잔 마시며 미팅하기 좋은 시간이겠지만 우리 같은 '을'들은 그 약속 시간 맞추려고 점심도 포기한 채 미팅 장소로 가야 하거든요. 우리가 당신들 일에 좀 더 관심 갖고 열정 갖고 임하길 바란다면 미팅 시간 한 시간쯤은 뒤로 미뤄도 당신네들 회사 안 망해요. 아니, 뭐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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