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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May 02. 2022

제주의 봄은 햇빛으로 완성된다

당신의 제주에는 햇빛이 가득했습니까

제주도를 처음 와본 것은 아니다. 업무차 2박 3일로 와본 적도 있고, 당일치기로 와본 적도 있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 전 연애시절 때 와본 적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여행에서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제주도의 봄을 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다들 예쁘다고 극찬하는 제주의 봄이지만 나는 늘 봄을 제외한 다른 계절의 제주만 마주했던 터라 제주의 봄이 어떤 느낌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흐드러진 유채꽃과 가장 먼저 피어오르는 벚꽃과 새빨간 동백꽃, 지천에 무수히 나부끼는 청보리까지 제주도의 자연 속에는 헤어릴 수 없는 아름다움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주의 봄을 만나지 못했던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돈과 시간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사실 돈이야 벌면 되고 모으면 되는 거라지만, 시간이 늘 애매했다. 이왕 오는 거, 길고 여유롭게 즐기고 싶은데 나와 똑같은 마음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갓 봄이 찾아올 때, 제주도나 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숙소와 비행기 티켓을 알아볼 때는 대부분 이미 늦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비행기 티켓 자체를 구할 확률도 굉장히 낮거니와, 연휴라도 붙여서 쉴라치면 어떻게 알고 일들이 몰아치는지 주말출근까지 강행해야 하거나 나처럼 연휴를 제주에서 즐기고 싶은 수많은 경쟁자들과의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돈다발을 쥐고 있어도 좌석이 없어서 못 오는 아주 슬픈 운명이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었을 테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의 제주 여행은 부지런했고, 뜻깊었고, 돈도 아쉽지 않게 썼다. 지난 10년간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항공 마일리지로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올릴 만큼 올려놓은 신용카드 한도로 한달살이 집세를 결제했다. 기어코 제주의 봄을 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무려 여행 7개월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한결 더 편안했달까? 제주도의 봄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일찍부터 준비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가 그동안 제주여행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꽤나 일찍부터 서두른 탓에 지금은 만석으로 매진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왕복 비행기 좌석을 확보해 놓고 제주도에 도착하니 기분은 좋았다. 제주도에 올 때마다 보는 공항의 야자수 한 그루마저도 봄의 싱그러움을 담고 있는 것 같았고, 하늘은 높고 맑았으며, 구름은 하얗고 귀여웠다. 공기는 적당히 시원하고 달큰했으며, 바람은 머리칼을 살랑이는 정도로 좋은 기분을 더 좋게 만들었다. 공항에서부터 피부로 느껴지는 제주의 봄이 신기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릴 반겨준 건 이틀 전에 보내 놓은 우리의 멋진 스포츠카였다. 한 달짜리 짐이 가득 실려 있는 우리의 자동차를 인도받자마자 향한 곳은 공항 뒤편 드넓은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카페였다. 최대한 해안 가까이 달려 나가 바닷바람을 잔뜩 맞아가며 도착한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수 두 잔을 시켜 나왔다. 목 넘김까지 시원하다, 이 얼마나 완벽한 시작인가! 제주도에서 만난 4월의 정오는 이렇게나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우린 왜 그동안 알지 못했을까, 와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났다.


그렇게 시작된 한 달짜리 제주살이의 거의 모든 날씨에는 햇빛이 빠짐없이 들이쳤다. 비가 오는 흐린 오전이어도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햇빛은 창가에 살포시 내려앉아 주었고, 맑은 날이면 작정한 듯이 따뜻함을 이곳저곳에 잔뜩 뿌려 땀방울을 송골송골 맺히게 만들었다. 이런 날씨라면 세차를 해줘야지, 오늘 같은 햇빛이라면 바다에 풍덩 빠져도 좋을 것 같다, 이 정도면 선크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가며 우리는 매일매일 쏟아짐이 멈추지 않는 제주도의 햇빛을 즐겼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도 더러 있었지만 햇빛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앞마당을 찾아 주었다. 비록 짧은 시간 잠시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날도 있었지만 늘 햇빛은 가득했다. 예로부터 제주도는 바람, 돌,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라고 했지만 한 가지를 빠트린 것 같다. 여기에는 햇빛이 분명히 포함되어야 한다. 3가지가 많은 게 아니라 4가지가 많은 섬. 충분한 일조량으로 사람들의 기분을 행복하게 만들어 버리는 신비한 섬. 우울한 기분 따위는 느껴질 틈을 주지 않는 그곳이 바로 제주도였고, 우리가 딛고 있는 바로 이곳이라는 게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유난히 정오를 좋아했다. 선선한 아침 공기에 쌀쌀함을 느끼고 있다가도 초록빛 마당을 더 눈부시게 비추는 햇빛을 마주할 때면 '햇빛을 만져볼 수 있다면 이런 간질간질한 느낌일까'라는 생각이 들기 일쑤였다. 비록 만져볼 수도, 정면으로 바라볼 수도 없었지만 햇빛은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우리에게 주었고 나와 남편은 정오의 햇빛을 에너지 삼아 하루를 시작했다. 햇빛은 아주 고마운 존재였다.



나란 여자, 지는 해를 마주하고 인생을 돌아볼 줄 아는...(?)
어제 봤던 그 노을색이 아니더라

정오의 햇빛을 예찬하곤 있지만 사실 제주의 햇빛은 아침, 점심, 저녁을 불문하고 모두 아름답고 찬란했다. 특히 숙소가 있는 서쪽에서의 일몰은 매일매일이 다채로운 빛으로 물들기 일쑤였는데,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노을을 보며 365일 모두 똑같지 않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침의 햇빛은 맑고 상쾌하다면 정오와 한낮의 햇빛은 달콤했다. 그리고 느지막한 늦은 오후의 햇빛은 진하고 쌉싸름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의 색은 우리가 오늘 하루를 어떤 기분으로 보내면 좋을지 보내는 신호 같았다. 단 하루도 우울하지 말라고, 제주의 봄을 만끽하라고 우리에게 쏟아진 햇빛에 이토록 간절하게 빼앗긴 마음을 우리가 과연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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