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숙정 Nov 05. 2022

더 이상 아이들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촛불을 밝혀줄게, 너희가 외롭지 않게




2014년 4월은 첫째 아이가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달이었다. 나 역시 엄마로서 모든 첫 경험을 치르고 있었던 때였다. 첫째 아이여서 그랬겠지만 어린이집을 보내면서도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는지가 늘 걱정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학교 교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있기도 했다. 그렇게 서툰 엄마에게는 첫 아이의 모든 것이 늘 낯설었고 걱정 투성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바다 건너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했다. 불안함 반, 설렘 반으로 수학여행 전날 밤을 설쳤던 것 같다. 아이는 나와 달리 처음 떠나는 친구들과 여행에 들떠 있었다. 배 타기 전에 꼭 문자하고 배에 내려서도 꼭 연락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물론 그런 당부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출발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문자 한 통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4월 16일은 큰 아이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일주일이 채 안되어서였다. 나는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장에 있었다. 공연 시작 5분 전쯤 되었을 때였다. 휴대전화를 끄기 위해 화면을 켰을 때 제주도로 가던 배가 침몰했고 모두 구조가 되었다는 뉴스가 포털 사이트에 다.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구조가 되었다고 하니 별 것 아닌 사고라 여겼다.






오전 11시 공연이 끝나고  다시 뉴스를 보았을 때 알았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고 사람들이 모두 구조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배에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수백 명 타고 있었다고 했다. 며칠 전 큰 아이도 배를 타고 제주도를 다녀왔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늦게 수학여행을 갔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내 아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솔직하게 했다. 내 아이가 저 배를 타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씩 바닷속으로 침몰해가는 세월호를 바라보며 그 속에 아이들이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잠을 잘 수도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여전히 배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배 안에서 아이들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구조하고 있다는 소식과 이상하리만큼 똑같은 화면이 며칠을 반복해서 화면을 채웠다.


매일같이 구조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아이들은 아무도 배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속에서 천불이 올랐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기도 힘들었다. 고작 떠내려가는 시신을 찾았다는 이야기만 들려왔다. 민간 잠수부들은 처참하게 죽어간 아이들의 시신을 눈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하나도 구조하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을까?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안산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어머어마한 높이의 체육관 벽면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는 순간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큰 아이는 이제 스물여섯의 아가씨가 됐다. 직장을 다니고 주말이면 홍대와 이태원 일대에서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보통의 이십 대처럼 유행에 민감하고 핼로윈을 크리스마스나 추석보다 친숙하게 여긴다. 한적하고 한가한 곳을 즐기는 나와 달리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로 넘치는 거리의 활력을 즐긴다. 보통의 이십 대처럼.


2022년 10월 29일, 나는 여느 때처럼 대학로에 공연을 보기 위해 2호선 지하철에 올라탔다. 토요일 지하철은 이십 대들로 가득했다. 아직까지 큰 추위가 없어서인지 청년들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뭔가 평범하지 않았다.


두터운 점퍼 아래로 짧게 찰랑거리는 원피스, 머리에 쓴 비즈로 장식된 머리띠 하며 눈매를 강하게 강조한 눈 화장까지. 이마 위부터 콧등까지 선명하게 내려 그은 핏자국을 한 청년이 지하철에 들어서고서야 오늘이 핼로윈 전야제란 것을 알게 됐다. 그제야 내 눈에 낯설었던 청년들의 옷차림과 화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홍대입구'를 알리는 멘트와 함께 엄청난 무리의 청년들이 지하철 밖으로 빠져나갔다. 갑자기 헐거워진 지하철 안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았다.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이태원 핼로윈 파티 압사'란 속보를 본 것이 11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8년 전 가슴을 조여왔던 통증이 몰려왔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큰 아이에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고 톡도 했다. 큰 아이는 연락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속보 이외에 이태원에 대한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아이는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아이에게 톡이 왔다. 이태원은 가지 않았고 놀다 친구 집에 들어와서 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8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울 대로변 한가운데였다. 좁은 골목길에서 아이들은 아우성치고 있었다. 경찰이 살려달라고 휘젓는 아이들의 손을 애써 잡고 끌어보지만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 속에 갇혀 있었고 조금씩 죽어갔다.


이후 펼쳐진 광경은 차마 입에 담지도 글로 쓸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다시 156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또다시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하나씩 증거들이 들춰질 때마다 찔끔찔끔 사과도 아니고 사죄도 아닌 이상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큰 아이는 8년 전 수학여행에서 살아남았고,  자주 가던 이태원을 그날 가지 않아 살아남았다. 이제 또 어떤 상황에서 운이 좋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이 살아남은 것은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삼풍백화점' 생존자의 말은 재난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예민하고 세밀해야 한다. 그것을 할 마음이 없고 국민들을 탓하고 싶다면 자리를 털고 나올 일이다. 더 이상 아이들을 죽여선 안되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이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벌새의 둥지는 2cm 크기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