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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Jul 30. 2024

이상한 나라의 택배 소녀

총알배송, 퀵배송, 당일배송, 새벽배송, 기다림을 거부하는 조급함에 대해


띵똥! 고객님의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한때 이 문자는 내가 사랑하는 문자였다.

밖에서 이 문자를 받으면 집에 가는 순간까지 걱정과 설렘이 교차했다.

요즘은 이 문자가 도착하고 현관문을 열면 반가운 택배 상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택배원과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지만,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이전만 해도 택배는 택배원이 직접 고객에게 전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택배가 온다는 문자가 오면 집에 있거나 택배를 받을 사람이 집에 있어야 했다. 

하루 걸러 한번은 택배가 왔던 우리 집에는 아주 늦은 밤에 배송이 됐다. 

밤 10시에 오던 택배가 11시, 심지어 12시에도 배달됐다.

그날도 그렇게 늦은 밤 택배가 도착했다.



처음에는 늦은 시간에도 배달을 해주는 것이 신기했다.

밤 11시 넘어 방문하는 택배원이 궁금하면서 이유 없이 불안하기도 했다.

다시 밤 11시가 지나 벨이 울렸다. 택배가 온 것이다. 

현관문고리를 걸고 살짝 문을 열었다.

십여 센티 벌어진 틈으로 현관 복도의 불이 켜졌다.

백색등 아래 모자를 눌러쓴 택배원이 내게 택배 상자를 내밀었다.



여자였다. 아니 소녀였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는 더 많은데 동안이었을까?

어쨌거나 눌러쓴 모자 밑으로도 어린, 아니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커진 내 눈과 택배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 후로도 우리 집 택배는 그 택배 소녀가 가지고 왔다.

그것도 꼭 늦은 밤에. 그 시간에 오는 것으로 봐서는 이곳이 마지막으로 배달하는 지역이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물건이 잘못 와서 반품을 보내야 했지만 나는 반품을 포기했다.

그 늦은 밤 그 소녀가 다시 물건을 가지고 올까 봐였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딸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 11시가 넘어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딸아이 또래의 택배원이 건네는 택배를 밤 11시가 넘어서 받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일하는 만큼 돈을 버는 일이기에 그런 배려 따위가 택배 소녀를 돕는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보지 않는 것으로 절반의 괴로움을 숨기기로 했다. 그 후로 택배사랑도 조금씩 식어갔다. 






택배 사랑이 택배 중독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2022년 코로나19가 조금씩 내리막을 향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팬데믹이 엔데믹(풍토병)으로 전환되었지만 비대면으로 돌아선 사회 시스템이 모두 대면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한번 바뀐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택배는 완벽하게 비대면으로 돌아섰다. 그러니 이 택배가 어린 소녀가 놓고 간 것이건,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배달한 것인지 알 필요도 알 수도 없었다. 사람을 보지 않으니 택배는 시스템만 남았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깜쪽같이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핸드폰 앱을 열고 주문을 하고 자고 일어나면, 집 앞으로 내가 원하는 물건이 도착해 있다는 편리함만이 남았다. 편리함이 자리를 잡고 나니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은 낭비였고 불편함이 됐다. 물건이 총알 배송에서 당일 배송으로 내 손안에 들어오는 시간이 줄어들자 나는 기다림을 거부하는 조급함에 점점 중독되어 갔다. 



하루 10시간 30분, 주 6일 평균 노동 63시간을 일했던 40대 택배 기사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났다. 

하지만 택배 기사의 사망 소식은 이번이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 

60대 택배 기사가 배달을 하다가 복도에 쓰러져 사망하기도 했고,

폭우 속에서 택배를 배송하다 급류에 휩쓸려간 택배원도 있었다.



총알 배송, 새벽 배송은 사람의 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동안 택배 뒤로 숨어버린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 뿐이다. 소비자의 무한 욕구와 자본주의 시스템의 폭주가 만나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총알배송 앱을 지우고 새벽배송 앱을 껐다. 음식 배달 앱에서 빠른 배달 대신 일반 배달을 선택한다.

지금 당장 사지 않으면 안 될 물건은 거의 없으니 필요하면 다음날 직접 구입한다.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오는 날은 배달을 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배달을 업으로 하거나 배달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소상공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수백 개의 배달을 마무리해야 하고 빠른 배달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도로에 서는 것은 안된다. 



그렇게라도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반격을 하기도 한다.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 그 이하라도 선택할 수 있게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지난 대통령 후보자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이 말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돈을 벌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

누구나 안전하게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야 맞다.

누구나 적정한 노동 시간과 휴식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세상은 성장해야 한다.



나 하나 거부한다고 해서 거대 기업들이 총알 배송과 새벽 배송을 멈추지 않는다.

나 하나 거부한다고 해서 거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 하나 변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라고 한다.

살아보니 그 말은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이 나이를 먹도록  그런 이유를 대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한 줌의 역할도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나 하나가 변하면 내 우주가 변한다. 내 우주가 변하면 내 주변도 변한다. 그 속도는 미미해서 아무런 변화를 못 느낄 수 있다.  나 하나의 변화는 미미하게 세상을 변화시키지만 나 하나의 변화도 만들지 못하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나는 '하나'를 변화시키기로 했다. 기다림을 거부하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한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 위해서. 



나는 요즘도 택배 소녀와 눈이 마주쳤던 찰나보다 더 짧은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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