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에 빠지기 쉬운 생각의 실수들: labeling
원치 않게 이 세상에 태어나 그저 웃기만 해도, 떠먹여 주는 밥을 잘 삼켜도, '구수한' 변을 건강하게 보기만 해도 사랑을 받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형제자매와 어울리고 학교에서 또래 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은 평가와 판단입니다. '너희 언니만큼만 해라'부터 '너희 형에 비해 참 차분하고 성실하네'까지 그것이 칭찬이든 비난이든 비교와 판단에서 시작되는 말들은 우리들을 그 속에 갇히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혹은 그런 착한 아이로 남기 위해서.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평가와 판단을 스스로 부여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난 구제불능이야', '난 해도 안돼 어차피'와 같은 말들은 흔한 예시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낙인찍기 labeling이라는 종류의 실수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오고 저질러왔던 실수인데요. 학업 경쟁, 직장 경쟁 속에서 숫자로 표시되는 성과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의 기회들에 대한 수행은 평가되고 또 스스로 평가합니다. 알랭 드 보통은 2009년에서 Ted Talk에서 성공과 실패에서 자유롭기 힘든 사회적인 구조와 그 속에서 빚어지는 개인의 고통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애당초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 알랭 드 보통은 그런 말들을 속물로 규정합니다. 나를 아껴주지 않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 쉽게 평가합니다. '이기적이네, 구질구질하네, 너무 나이브하네'와 같은 말들은 단순하고 폭력적인 판단입니다. 이기적이면서도 따뜻할 수 있고, 구질구질한 것이 아니라 정이 많을 수도 있으며, 나이브하면서도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혹시 스스로에게도 속물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볼 차례입니다. 나를 아껴주지 않는 속물처럼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 그가 실패했다고 해서 패배자인 것은 아닙니다. 한번의 결과가 나를 규정짓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성취하지 못한 것은 사실일지라도 패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낙인찍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고 위축됩니다. 거꾸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본다면 어떨까요. 운수가 나빴던 것이었다면 패배했을지라도 또다시 기회를 잡으면 됩니다. 혹은 꼼꼼하게 챙기지 못했던 어떤 측면을 발견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의 전환을 소위 '정신 승리'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생각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심리학의 '자기 패배적 예언'에 대한 연구들이 보여주듯이 스스로 패배자로 규정짓는 순간, 정말 패배자가 되길 바라는 것처럼 새로운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게 되고 기회가 오더라도 최대치의 노력을 쏟지 못하게 됩니다.
먼저 스스로 '단편적인 판단'이 시작됐다는 점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서 그 평가를 지지하는 증거와 반대하는 증거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부당한 판단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됐다면 이제 이번 경험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봅니다.
나의 다양한 모습을 다시 발견하는데서 나아가 새로운 나로 확장해나갈 수도 있습니다.
A kinder, gentler philosophy of success | Alain de Botton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