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가 보내는 편지 - 1
Photo by Kate Macate on Unsplash
상희씨, 우리가 만나서 제게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당신은 머릿속이 흐릿하고 일에도 관계에도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어요. 누군가의 말이 혹시 나에 대한 비난이나 서운함은 아닌지 예민해지고, 별일 아닌 일에 괜스레 억울해지기도 한다고 했어요. 거기다 이미 한참 전에 이별한 A가 자꾸 떠오른다고도 했어요. 그와의 여러 기억들을 복기하며 추억하고, 그 관계에서 내가 부족했던 점을 지적하고 있었어요.
사소한 집안일이 밀리기 시작하고, 좋아하던 넷플릭스도 그저 틀어두고만 있었다고요. 별일 아닌 듯 가볍게 주변에 이야기해보지만, 사실 스스로에게 화가 났었다고요. 감정에 휘둘리는 것 같아서 힘들었나요.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지만 혹여 내가 너무 가라앉아있지 않을까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상희씨도, 우울할 때면 쉽게 고개를 드는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친구들과 만나니 어땠나요? 실없는 농담이나 지인들의 소식들을 나누면서 함께하고 있는 상희씨를 봤어요. 그 속에서 상희씨는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여요. 과장된 웃음은 아니더라도 소소한 기쁨이 깃들고 있었어요. 친구들과 헤어지는 덕수궁 길에 보았던 아이를 안고 거니는 가족들, 남자와 남자인 친구들, 상기된 연인들 할 것 없이 따뜻해 보여요. 그 순간을 가만히 바라보는 상희씨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을까요.
상희씨는 그날 시답지 않은 말장난과 핀잔 속에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여러 생각들로부터 조금은 거리 둘 수 있었다고 했어요. 집에 돌아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수북이 쌓인 흔적들을 그러모아 분리수거를 해요. 자주 했지만 한동안 멀리했던 요가채널을 용기내 틀고 있는 당신이 보여요. 거기에는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의 회복'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퀀스가 업데이트되어 있었다고요. 요가를 하면서도 생각은 자꾸만 밀려들고 어쩔 수 없이 빠져들다가도, 요가 동작을 따라가면서 곳곳에서 근육의 긴장과 이완이 느껴졌을지 모르겠어요. 생각들과 싸우기보다는 그렇게 몸을 움직이고 약간의 통증을 느끼는 게 차라리 편안해 보여요.
시퀀스의 마지막 즈음에 요가소년은 양팔을 교차해서 어깨를 감싸 보자고 제안해요. 그 순간 '이게 어디에 자극을 주는 스트레칭인가' 망연히 따라 하다가, 곧이어 '나를 충분히 안아줍니다'라고 다독여주기를 청하는 말에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어요. 그 순간에 요즘 스스로에게 했던 여러 지적과 평가들, A를 떠올리며 괴로웠던 순간들, 그것들이 실은 내가 나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요. 우울한 기분에 따라서 또다시 나를 아껴주지 않으면서, 사랑을 주고받았던 그 순간들이 그리워졌던 것이라고요. 침묵 속에 스스로를 지긋이 안으면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상희씨가 보여요.
그때 알아차렸다고 했어요. 기분에 따라서 '사랑받을 만함'과 '가치 있음'을 의심하는 건 비참하고 애처로운 일이지만 또다시 반복되리라는 것을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소한 순간, 덕수궁에서의 장면들, 그리고 그 밤의 요가처럼, 함께하고 위로받으면서 이렇게 회복하리라는 것도요.
당신이 겪은 감정과 생각들은 마치 인생이라는 요리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맛과 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여러 식재료와 향신료들이 모여서 하나의 요리가 되고, 그것을 위해서는 준비와 설거지도 기꺼이 해야 할지 몰라요. 당신은 용감하게 그 낯선 불편함을 견디고 다시 요리를 시작하고 마무리해나가요.
상희씨, 당신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나누어주어서 고마워요. 거기에도 지금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나요? 다시 홀로 요리를 시작한 당신이 아직 궁금합니다. 이제 당신이 만들어갈 깊고 풍부한 여정을 상상해봅니다.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이렇게 가끔 찾아오는 선선한 바람이 함께하기를 바라요.
*이 글은 픽션입니다.
**음성으로 듣기: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877/clips/30
***유튜브에서 '요가소년 311'을 검색하시면 영감을 받은 요가 스트레칭을 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