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같이 앉아도 될까요?”
라고 말하면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내 앞에 앉았다. 멍하니 핸드폰만 바라고 보고 있던 내가 미처 반대의견을 피력하기도 전에, 남자는 의자를 유난히 소리 나게 빼어 털썩 앉았다.
“반가워요 Y 씨. 전부터 만나고 싶었어요.”
남자가 크고 흰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걸까? 내가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자, 남자는 손을 머쓱해하며 거두었다. 그리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불쑥 이렇게 말하면 놀라시는 게 당연하겠네요. 제 소개를 먼저 해야겠지요?”
남자는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더니 주섬주섬 명함을 꺼냈다. 꽤 좋은 품질의 명함에 그의 이름 석자가 쓰여 있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려가며 명함을 읽고 있는데, 남자가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좋은 명함 같죠?.”
-명함 같죠?
나는 마치 그 명함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기묘한 어감에 손등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가방을 꼭 쥐고 금방이라도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러자 남자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아! 아니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시면 다 이야기되실 거예요.”
남자는 내 불안을 잠식시키려고 하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저는 과거의 당신입니다.”
하고는 깔깔 웃는 것이었다. 가방을 잡은 손의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되물었다.
“뭐라고요?”
“말 그대로예요. 저는 과거의 당신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곧 제 미래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순간적으로 남자의 말을 이해하려다가, 아주 당연한, 그저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치부하자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세워지기 직전이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아차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음…… 모든 인류가 접니다. 저였고, 저 일 것이죠. 이젠 물론 저 일 사람이 저였던 사람보다 현저하게 적기는 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내 커피를 가져가 마셨다. 나는 남자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보느라 그것을 채 저지하지 못했다. 화가 나려다가도 남자의 기묘한 태도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아니, 그냥 적은 정도가 아니긴 합니다. 저의 끝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저의 죽음이죠…… 지금까지 길고 긴 시간을 살았지만 저도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군요.”
나는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체념하고 남자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가 당신을 죽이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하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이 곧 제 미래니까요. 음. 설명이 좀 필요하겠네요.”
남자는 그러면서 테이블에 놓여있던 설탕 스틱의 한쪽 끝을 찢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에 일자로 쭈욱 뿌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악하여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주위의 아무도 이것을 신기하게 보지는 않았다. 테이블을 지나치는 알바생조차도 딱히 남자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남자는 연거푸 4개의 설탕을 처음 뿌린 설탕과 같이 일자로 쭉 깔았다.
“이 설탕이 Y 씨의 시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서 남자가 일자로 그어진 설탕을 따라 손가락으로 쭉 그었다.
“그리고 이 손가락은 Y 씨입니다.”
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Y 씨는 이 설탕 위를 쭉 따라가면서 살겠죠? 시간이 지나는 것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죠.”
남자는 이제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뿌려놓은 설탕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주술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게 저입니다.”
남자는 일자로 흐트러진 다섯 줄의 설탕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며 왔다 갔다 무늬를 그었다. 이제 설탕은 격자무늬로 변했다.
“저는, 아니, 우리는, 보는 것과 같이 Y 씨가 느끼는 시간축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간이 흐를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을 이동한다고 해야 할까요.”
남자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아시겠어요? Y 씨가 앞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자는 다시 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저는 최초의 네안데르탈인이었고, 핵전쟁으로 피폭되어 죽은 마지막 인간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기도 하고, 어저께 굶어 죽은 거지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태어나고 난 후 바로 사고로 죽은 당신의 아버지였던 적도 있고, 당신이 임종을 지킬 어머니 이기도 하죠.”
남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엔 Y 씨, 당신은 그저 떨어지는 모래알 같은 거예요. 중력을 거부할 수 없는 모래알 말이에요. 하지만 실제로- 남자는 목을 으쓱했다 -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아니, 우리는 그랬던 적이 없어요. 우리가 보기에 시간이라는 단순한 축에선 모든 게 동시에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남자의 마지막 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물음에 내 테이블 건너편의 노신사 - 내가 카페에 오고 나서 곧바로 들어온 -가 커피잔을 들어 동의의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카페 종업원이 말했다.
“우리는 곧 하나예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가 말했다.
“인류는 한 번도 남이었던 적이 없죠.”
카페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작게 읊조렸다.
“오직 나만 있을 뿐.”
순간, 모든 세상이 멈춘 것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 주위에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카페 안의 모든 사람부터 창 밖의 자동차, 트럭, 행인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제 갈길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하지만 끝이라는 개념은 시간보다 먼저 만들어졌어요. 영원에도 끝이 있는 법이죠.”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서글픈 눈으로 말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나’는 당신, Y 씨 밖에 없어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떻게 인류가 하나일 수 있다는 거예요?”
“언젠가 당신도 이해하게 될 거예요.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죠. 작은 힌트예요. 어째서 타인의 감정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고, 분노하고, 생각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요. 답은 이미 예전의 제가 내어놨죠.”
남자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것저것 눌러대더니 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나는 떨떠름하게 핸드폰을 받았고, 거기엔 흑백 사진의 한 노인이 있었다. 스크롤을 조금 내리자 카를 융이라는 사람 이름이 보였다. 언젠가 한 번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는 이론을 세운 사람이에요. 정확히는, 꽤나 최근에 저죠. Y 씨가 이해할 수 있는 시간 단위로는 겨우 300년 정도랄까.”
남자는 다시 내 커피를 홀짝이고, 창 밖을 보며 잠시 택시가 지나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다시 응시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살짝 볼에서 홍조가 보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모두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겁니다! 투영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멍청이 같은 예전의 나 같으니라고! 너무 젠체했다니까!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이 지루하게 흘러가는 한 시간선에서의 다른 가능성,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모든 감정은 자신을 향해있는 거죠. 정확하게.”
남자가 마지막 단어를 반복하며 흥분으로 팔을 휘젓는 바람에 커피를 쏟아버렸다. 그러자 아까 스쳐 지나갔던 종업원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와 유리조각을 치웠다. 남자가 연신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자 알바생이 예쁜 보조개를 띄우며 괜찮다며 말했다. 남자와 종업원이 미소를 주고받았다. 잠시 소란 뒤에 종업원이 떠나자 남자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와! 정말 멋지지 않나요? 저에게 저런 멋진 보조개가 있었다는 거 말이에요. 계속해서 보고 싶은 보조개였어요. 그리고 저는 기억하고 있어요. 분명히 이쯤에서 지금의 제가 저분의 번호를 따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결혼할 거예요. 내가 우리의 자식이었을 때 분명 행복했었죠.”
남자는 종업원이 카운터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종업원은 남자의 시선을 느끼곤 홍조를 띠며 얼굴을 돌렸다. 내가 보기엔 분명 좋은 신호 같아 보였다.
“여태까지 수천억 개의 인생을 살았지만, 아직도 사실 놀랍기는 해요. 단 하나도 같지 않았어요. 단 한 명도 말이에요. 히틀러나 예수 같이 특별한 사람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저 많은 인파-남자가 손가락으로 횡단보도에서 밀물같이 밀려드는 사람을 가리켰다-에서, 평범한 저 사람들도 하나도 같지 않아요. 다르게 말하면 내 안에 저러게 많은 사람이 있는 거겠죠. 수천억 개의, 아니,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남자는 벅찬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이내 곧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만약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모두 하나이고, 정말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신이 시간을 거스르든, 앞으로 가든 갔다 쳐요. 그리고 내가 그 마지막이고. 그러면 나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어차피 당신은-우리는- 모든 걸 알게 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묻자 남자는 전에 없이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맞아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게 항상 인류의 멸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마지막 내가 죽음으로 말이에요. 영원의 끝이라고.”
남자는 테이블 너머 나에게 불쑥 몸을 들어 기울였다. 나도 덩달아 몸을 기울였다. 남자가 소곤소곤 말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이제야 깨달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남자가 내 귓속에 대고 속닥속닥 이야기했다. 멋지고 경이로운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자의 말을 잠깐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에피파니가 지나갔으리라.
남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복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말했다.
“와, 정말 번호를 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에요.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네요. Y 씨, 잘 있어요. 곧 다시 만날 거예요.”
하면서 남자는 성큼성큼 카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곤 그 종업원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 광경을 잠깐 지켜보다가, 도저히 앉아있을 기분이 들지 않아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해가 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다. 하늘이 갓 익은 홍시처럼 빨갛게 익어간다. 익어가는 하늘 반대편에서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마음 급한 별들이 반짝인다. 남자가 아까 말한 귓속말이 내 마음에 요동친다. 나에게서 영원이 끝난다는 말이었다. 영원의 끝. 그리고 무한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