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아빠상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데 글로 쓰기는 어려운
"아이들에게 건강한 아빠상이 필요해요."
내 초임 발령지에서 들었던 말이다. 그 해 나는 퇴직하시는 선생님 뒤를 이어 9월부터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퇴직하시던 노 선생님은 나를 불러 네다섯명의 학생들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구잡스런 아이들'이라고 말해주셨다. 그리고는 떠나셨다. 인수인계라면 그게 인수인계였다. 구잡스럽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사전을 찾아보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구태여 찾아보지 않아도 '구잡스런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은 주의가 산만했다. 그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선생님의 허락 없이 말을 시작했다. 그 아이들의 말은 바람처럼 아무 내용이 없었지만 교실을 한바탕 휘저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초등학교 2학년 개구쟁이 학생들에게 무슨 알맹이 있는 대화가 있었을까.
그들 중 가장 구잡스런 아이들이 둘이었는데, 둘은 이혼가정으로 엄마와 함께 살거나 조부와 함께 살았다. 이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고 나는 도움이 필요했다. 아이들 지도에 대해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은 관리자도, 옆 반 선생님도 아닌 교육복지 지도사님이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이라고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다 알겠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나는 더 나은 교사가 되었다. 나름의 학급 운영 철학이 생겼다. 맹하니 착한 것과 친절한 것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화가 났을 때 정확히 어떤 지점이 나를 화나게 하는지 표현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성인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들임에도 상대가 왜 화났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꽤 있다. ) 관계를 해치지 않으며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을 적절히 풀어주고 조이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또 지도하기 어려운 학생을 만났을 때 학부모와 상담하고 상담교사 등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줄도 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하소연했다.
"선생님의 역할이 정말 커요. 이 아이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아빠의 부재예요. 아이들에게 건강한 아빠상이 필요해요."
"건강한 아빠상이요? 저는 아빠였던 적이 없어요."
"꼭 아빠가 아니어도 건강한 남자 어른상이 필요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선생님 지금 모습 그대로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실 '건강한 남자 어른상'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우선 나는 내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떤 모임이든 자신은 정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가장 비정상으로 보이듯이 스스로에게 괜찮다, 건강하다고 말하기가 두려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4차원 소리를 듣고 자란 나의 자아는 스스로 정말 '건강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확고하게 자기주장을 펴나갔지만 정작 스스로는 그것이 옳은지 갈팡질팡하는 상태였다. 나는 철부지였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또 '어른'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첫 직장 생활을 하며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고 자주 뭔가 배워야 할 입장이었다. 학교 내에서 선배 선생님들이 신규라며 애기 보듯 바라보는 시선이 익숙하고 편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사람 좋은 척 웃고 다니는 것이었지 교실에서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교대에서는 어른스러운 모습과 리더십을 가르치진 않았다. 그 당시의 나는 교단에 오른 방황하는 대학생일 뿐이었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나는 그저 그런 선생님으로 남았을지, 서투른 선생님으로 남았을지 아니면 곧 금방 잊혔을지 모를 일이다.
자주 떼쓰고 호불호가 분명해지는 두 돌 아기를 키우고 있다. 이제 나는 지도사님이 말했던 건강한 아빠상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민망하지만 나 스스로 건강하고 좋은 아빠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언제부터 나의 인식이 바뀌게 되었을까? 책을 많이 읽어서인가,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렇게 되나, 아이를 낳아서 그럴까,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아서? 그저 시나브로 그렇게 되었다. 대단한 변화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옛 일을 생각할 때 바로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듯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아는 그 인식의 차이가 종이 한 장처럼 얇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종이 한 장을 뒤집을 수가 없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그런 것이다.
부족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문득 깨닫게 된 나의 성장을 칭찬하고 축하하고 싶다. 잘했고, 앞으로도 잘할 거야. 계속해서 건강하고 좋은 아빠가 되기를 낙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