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이후로,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되어본 적이 없어 많이 무섭고, 어려웠을. 하지만, 내가 태어난 이래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었으므로,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 외의 다른 무엇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아버지의 직업이다. 아버지는 회사원이셨다. 그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내가 태어난 이전부터 오래도록 아버지를 수식해온 직함이었으므로 나는 아버지가 회사원인 게 '아버지'만큼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당연한 건 너무 마땅한 탓에 구태여 그것의 곤경을 가늠해보지 않는 것처럼. 직업이 갖는 생계의 무게를 몰라 그리 쉽게 떠올리고 감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나, 나는 살면서 몇 번의 어긋남을 경험한 후 이제는 '당연하다'는 말을 섣불리 내뱉지 못하게 될 나이가 되었고,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이지만, 더 이상 회사원은 아니다.
사실, 회사원으로서 아버지의 생활을 나는 잘 모른다. 단편적인 몇 장면들만 겨우 떠올릴 수 있을 뿐, 내가 아는 건 많지 않다. 기껏해야, 퇴근길 아버지가 꼭 사원 두 분을 뒷좌석에 태워 주었다는 것 정도. 당시, 나는 두 사원 사이에 앉아 오가는 얘기를 열심히 귀 기울여 듣기를 잘했다.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누군가의 감탄에 감탄을 얹어가며. 나는 뭔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낱말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적잖은 기대를 갖고서 말이다. 분위기에 동참해, 그 분위기를 계속 이어보려고 버둥거렸다. 내 오른편에 앉은 사내는 마른 체형에, 목소리가 느긋했다. 머리도 짧아 단정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그렇게 평생을 짧은 머리로, 단정한 인상을 풍기며 살아갈 느낌이 든다. 그 이후, 나는 그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먼 나중의 일이다. 그때까지도, 그 사내는 짧은 머리였다. 내 왼편에 앉은 사내는. 아쉽게도 그 사내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사진 한 구석을 오려내는 일처럼, 내 회상에 빈 공석으로 남아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그 존재감이 옅어 결국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내 회상의 재연 속에서 언제까지고 부재한 상태로 남아 있다. 가끔은, 내가 그를 애써 지워버린 것 같아 못내 미안해지지만, 그럼에도 내가 끝내 그들을 생각해 낼 수 없는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그들과 내 삶의 궤적이 어긋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런 건 누구의 잘못도 될 수 없으므로, 분명 나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실업하게 된 때는 소위 말하는 '밀레니엄' 직후였다. '밀레니엄'은 이전의 새해와는 조금 달랐다. 일시적인 순간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에 가까웠다. 새해는 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약관처럼, 사람들을 조금 엄격하고 신중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자신에게 기대를 바란 적이 없는 시간 위로, 사람들은 몇 가지의 사소한 단절과 바람을 실어 보냈다. 날에 날을 거듭하며 의당 그래 왔을, 순서를 되풀이했다. 그즈음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게 되거나 다짐하는 일이 늘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밀레니엄' 앞에서 우리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그 말에서 극도의 불안과 우려, 기대와 희망을 동시에 엿봤다. 세계는 과도하게 들끓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세계의 부추김에 떠밀려 섣불리 뭔가를 결정하려는 것 같았다.
동네 온갖 간판에 '밀레니엄'이란 말이 새겨지고, 예측과 전망이 쏟아졌다. '기술 변혁', '전자통신' 같은 말이 사방에서 난무했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질병이 사라지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수명을 늘릴 수 있게 될 것으로 내다본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컴퓨터와 인간이 결합된 사이보그가 세상을 주도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다. '개인의 말보단 세계의 말이' 도처에서 퍼져 나왔다. 얼마나 어긋났는지 모른 채, 과거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나친 미래지향적 이미지가 그려졌다. 홀로그램 의복에 삐죽하게 솟은 머리로, 공중을 부유하는 갖가기 사물들을 익숙히 여기는 모습들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미래에 이룩하고 성취해야 할 바일지도 몰랐다. 세계는 바삐 무언가가 되려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으니까. 그러니, 아버지가 실업했던 이유도 혹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계는 황급히 무언가가 되고 싶어 했고, 그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아버지가 그만 이탈해버린 거라고. 내 기억 속 왼편의 사내 얼굴이 점점 지워질 무렵도 아마 그즈음 일거라고.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경황없이, 안간힘으로 그 속도를 쫓고 있는 중이다. 하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평생을 그 속도에 눈치를 보는 것일 뿐. 다시는 아버지 인생에서 그 속도와 동행할 날은 오지 않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누군가를 점점 잊는 일이 내 잘못이 될 수 없듯, 분명 아버지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점점 무언가 배우기를 꺼려했다. 아버지의 몸이 서서히 늙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걸 떠나, 습득하는 데에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나이가 들어 뭔가를 깨우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년 시절. 사회적인 문법 안에서 단계적으로. 약간의 능동과 대부분 수동적인 학습 과정을 거쳐 자연히 배우는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에겐 뭔갈 이해하기 전, 기존의 것과 대면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스스로의 내부를 헐고 다시 복원해야 하는 번거로운 공정을 거쳐야 했다. 아버지는 이따금씩 이 모든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내게 나서서 따지거나 어렵다는 듯 반복해 물어왔다. 나는 동음어를 구분하기 위해 이국의 말을 빌려올 때처럼, 새로운 언어를 설명하기 위해 아버지 세계에서 통용된 언어를 가져와 소화시켰다. 몇몇 말은 아예 이해하길 포기한 채 습관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팟캐스트'같은 언어들이 그랬다. 언젠가, 라디오를 듣고 싶다 말한 아버지께 알려드린 말이었다. '라디오' 비슷한 거지만, 라디오는 아니라고. '어플'이니 하는 말들도 전부 그랬다. 나는 아버지께 새로이 말을 쥐어줄 때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말이 이렇게 많은가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과는 반대로, 이젠 존재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라지고 망각된 말들도 분명 많을 거란 생각도 얼핏 스쳤다. 물론, 잊혀진 말들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져 내가 기억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아 사라진 줄도 모르는 무엇들을 상상하다 보면, 내가 어떤 '의무'를 져버린 것 같아 괜스레 미안쩍은 감정이 들었다. 만성적인 후회도 함께 따라왔다. 자의적으로 포기하거나 버린다 해도, 보내는 일은 늘 마음 한 켠에 묘한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아버지는 하나의 말을 맞으며, 다른 무엇과 끊임없이 작별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엇갈림에서 아버지는 지나온 길목을 더듬듯 생경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연인이 이별의 목전에서 문득 과거를 상기할지언정 그 회상이 이별을 결코 막아주진 못하듯, 아버지의 주저도 그러할 터였다. 오고, 가는 일은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고,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불가피한 일이니까. 설령 그게 사람 말이나 시절, 삶의 한 방식이라 해도.
아버지는 지금 작은 호프집을 운영하신다. 아버지가 처음 호프집을 하나 운영한다 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버지가 일평생 술을 멀리 해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과연 아버지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가게를 차리게 된 데에는 과거 '오른편의 사내'가 한몫했다. 들은 바로는, 그 사내가 대학가 근처에 술집을 차려 잘됐다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개강하기 약 한 달 전 집에 잠시 머무는 사이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요지는 간단했다. 도와줄 수 있겠냐는 거였다. 때 마침, 싸게 매물이 나와 인수인계만 받은 후 곧장 엽엉을 할 계획이라 시간이 촉박하다고. 내겐 이렇다 할 결정권이 없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오른편의 사내'에게 말을 잘 해두었으니, 가서 일을 좀 배우면 된다고 일렀다. 그 말이, 나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빠는?"
아버지는 아직 '서류상 필요한 절차'가 있다며 둘러댔다. 그것은 아주 '복잡한 과정'을 빌미로 지극히 단순한 '이유'를 가리려는 말이었다. '절차'나 '수속', '의례' 같은 말들이 대게 그랬다. 나는 아버지를 그토록 소극적이고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그 이유가 그 둘의 '관계'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보다 늙은 사람이 보다 젊은 사람을 가르치는 건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보아 오고 경험해온 장면 중 하나였으므로, 아버지가 그 역전된 관계를 남사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이라고. 아버지는 며칠 동안 가게에 방문하기를 꺼려했다. 간다, 간다 해놓곤 정작 모습을 비춘 적은 없었다. 그러다 슬슬 '근처에 일이 있어서.'라든가, '근방을 지나가는 김에.'를 핑계 삼아 드물게 가게를 찾았다. 미루고 미루다 말의 효력이 다 닳을 즈음, 상대를 안심시키려 어물쩍 보이는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가게 앞을 얼쩡거리거나, 손님인 척 술 한 병을 시켜 홀짝이다 사라졌다. 어느 땐 가게에 손님이 가득 들어차기라도 하면, 제 가게에 들어온 손님인양 좋아했다. 그것이 마치 이른 시일에 일어날 순조로운 암시처럼 느껴져 좋았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드물게, 가끔, 점점 자주 가게를 방문했다. 나는 아버지가 슬슬 '관계'와 마주하려는 건가 싶어,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아버지는 주방에 들어온 이후부터, 쉴 새 없이 끄적이기 시작했다. 사내와 내 행동을 주시하며 묻고 받아 적었다. 아주 사소한 동작 하나까지, 그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어쩌다 손님이 꽉 들어차 조금 신경질적인 투로 대꾸할 적에도, 아버지는 한 번을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나를 격려했다. 아버지는 '관계'를 그리 큰 장애물로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내겐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것에 반해,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가 된 것이 수많은 선택 중 '일부'였을 뿐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줄 곧 머뭇거렸던 건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에게 결심을 부추긴 건 또 무엇이고.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대게 타인을 상상하면서, 그 위치에 자신을 덧씌우는 존재들이니까. 나는 아버지를 상상할 수 없고, 아버지가 된 '나'를 상상하고 마니까. 결국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버지의 외형적 행동뿐인 것이다. 아버지의 손과 아버지의 말. 어떤 눈빛. 그 모들 행동들이 남긴 여운과 잔향을. 내 기억의 유효 속에서 점점 잊혀지고 있을 장면만을, 나는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일은 점차 손에 익기 시작했다. 능숙하지도, 미숙하지도 않은 실력이었다. 아버지는 서툴렀지만, 가게의 전반적인 정황은 다 파악한 듯했다. 제법 사장으로서의 지위, 직원으로서의 태도를 갖춘 게 눈에 보였다. 아버지는 젊은 손님에게 깎듯이 대하는 걸 더 이상 어색해하지 않았다. 젊다는 사실만으로 금세 말을 놓곤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손님이 크게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던가, 그러면 안된다는 주의를 준 건 아니었다. 단지, 혹시 모를 난감한 상황에 대비해 아버지 스스로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이었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손님을 맞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려보냈다. 오는 사람에겐 어서 오라 하지 않고 '와주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물론 가는 사람에게도 단순히 잘 가라 하지 않고 '다음에 또 방문해달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과도한 친절이 사뭇 어색하게 다가왔다. 손님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행동이나, 어떤 이질적인 층을 지우려 어설프게 건네는 말들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탈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의 큐티클을 벗어내며 자신을 갱신하는, 낡은 표피를 버리고 몸의 규모를 넓혀가는 동물같이. 그것이 자연적인 환경이 아닌 사회적인 조건이 되었을 뿐,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생에 순종하고, 요구되는 삶의 수순에 적응을 필요로 하는 건 어느 생물이나 매한가지였다. 그건 우리가 근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홀로그램 의복에 삐죽하게 솟은 머리' 따위를 그리고야 마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가 현대의 문명이 주는 당혹감에 빠져있을 때면, 종종 뒤숭숭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아버지에게서 빤한 안타까움이나 측은함을 본 건 아니었다. 물론, 내가 무언갈 알고 있다는 상태에서 비롯된 자만이나 너그러움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 아버지를 무지한 사람, 시대에 둔감한 사람으로 볼까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늙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삶의 변방으로 점점 밀려난다는 뜻이었다. 그건 태만이나 나태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버지만 봐도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을 부지런히 살아온 사람이었다. 다만, 그 '부지런'의 의미가 조금 달랐다. 요즘 시대의 부단함이, 세계 경향을 파악하고, 주류 언어를 습득하며, 최신 도구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것이라면, 아버지에겐 기껏해야 성실하게 밥벌이를 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의 성실함이 혹여 어떠한 '과실'처럼 여겨질까 걱정됐다. 누군가 자신의 범주 안으로 끌고 와 변론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삶 전체를 멋대로 가정한 다음 흉을 볼 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대게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건, 타인의 마땅찮음이 아닌 상대적을 자신이 합당하다는 결론을 도출해 안도감을 취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로,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타인을 데려와 손쉽게 소비하는 방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가 운영할 가게가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몰랐다. 무슨 연유인지 명확한 가게의 주소지를 일러주지 않았다. 나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당장 신경 써야 할 건, 내 학업과 내 연애와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이뤄질 법한 모든 알력. 그 관계에 얽힌 온갖 소모적인 감정들이었다. 개강까지도, 어느덧 이 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더 그랬다. 나는 계획된 앞으로의 생활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 조금 막막해 있었다. '학생'이라는 말이나, '청춘'이라는 말에 더 이상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기. 그런 말들이 모든 것을 허락하고 수용하며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말처럼 들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나 어떤 책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래선지 나는 편하게 낙관하고, 소비했던 '젊음'에게 보상심리를 가지 듯, 스스로 이렇게 묻는 날이 잦았다.
"그동안 뭘 했지?"
어느새, 일을 배우는 기간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마지막 날, 아버지는 내게 '수고했다'며 늦은 식사를 제안했다. 나는 순전히 '축하'의 의미에서 받아들인 거였는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근처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내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진중한 말을 꺼내기 전, 으레 내보이는 불편한 정적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우리는 근처 식당가를 느긋한 걸음으로, 약간 어줍은 안색으로 돌아다녔다. 아버지는 곧 가게 간판 하나를 가리켰다. 간판엔 '볏짚꼼장어'라 쓰여 있었다. 꼼장어 한 마리가, 엄지를 치켜든 채 보기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 꼼장어 먹어 봤니?"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곤 내가 모르는 무언갈 발견한 것이 내심 기분 좋았던지 '한 번 먹어 볼래?'하며 운을 띄웠다. 생전 먹어본 적 없는 음식들을, 나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뗐다. 아버지가 '한 번 먹어 볼래?'라든가, '한 번 해볼래?'하고 넌지시 제안하면, 그에 동의하면서.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알고 있다는 자만과 너그러움을 가져도 내심 불쾌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모처럼 가르칠 게 생겨난 아버지의 기대를 해치지 않으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