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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Sep 28. 2015

생태적 인간의 탄생

생태적 관점에서 예수 읽기

함께 읽는 책 No. 08

프란츠 알트(2003), 『생태주의자 예수』

자크 브로스(2005), 『식물의 역사와 신화』

게리 윌스(2007),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아들도 노숙자로 세상에 오셨다 


현지시각으로 2015년 9월 24일, 워싱턴 의회 인근의 성패트릭 성당에서 300여명의 노숙자 등을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가 말구유에서 탄생한 사실을 거론하며 "하느님의 아들도 세상에 노숙자로 오셨다"고 위로했습니다. 미국의 문화역사가 게리 윌스는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공적인 생애 동안 노숙자로 살며 노숙자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재벌에게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목사에게는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예수가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다음과 같이 탄식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 마르코 7장, 6~8절


물론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랍비도, 아버지도, 지도자도 없으며 모두 형제자매라는 예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권력화하여 예수를 자신의 입맛대로 왜곡하고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생태, 환경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해 와서인지는 몰라도, 주류 기독교계는 지금껏 자본 및 자본가의 이익에 철저히 부합하는 자본주의의 청지기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생태적 삶을 실천했던 예수의 모습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 부정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의 친구였던 예수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 마르코 4장, 26~29절



태양은 저절로 빛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농부의 일상에 비유한 예수의 생태적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의 표현 속에 흙과 자연, 식물과 동물은 매우 흔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도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씨앗의 성장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대목은 단순히 하느님 나라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도래할 것임을 예언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의지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며 바로 그 때가 추수할 때, 즉 심판의 때라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정작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독일의 언론인이자 환경운동가인 프란츠 알트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저절로' 빛나고 바람은 '저절로' 불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저절로' 정화되며 나무와 식물은 '저절로' 자란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남자들에게 '받아들임'이라는 이 여성적 미덕이 아주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남자들이 산업사회의 발전을 여전히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자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만들고, 또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저절로' 다가오는 태양, 바람, 물이야말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저 불안한 핵 쓰레기, 공기 오염, 물 오염, 숲 파괴, 토지의 산성화와 같은 부작용을 낳지 않는다.

- 프란츠 알트, 《생태주의자 예수》 82쪽


프란츠 알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서 '저절로'라는 단어에 주목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의지나 욕망이 아닌 '하느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태양과 바람과 물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듯이, 인간이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태초의 인간이 그랬듯이, 지금의 인간도 선악과를 먹으라는 뱀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에덴 동산으로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으로의 귀환이란 청지기적 삶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땅과 바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들을 잘 가꾸고 돌보아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예수 자신이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겨자씨의 질적인 변화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 마르코 4장, 30~32절


우리는 이 비유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태적 관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하느님 나라의 '양적인 확장'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질적인 변화'에 대하여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는 곳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며, 섬기는 사람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이보다 더 큰 질적인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지 않는 한, 우리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이러한 변화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과 생태의 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러한 변화는 곧 우리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프랑스의 식물학자 자크 브로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예수를 비롯하여 위대한 다른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 자주 식물에 비유해서 설교한 것은, 오직 식물만이 모든 의미에서 인간의 물질적인 조직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적인 삶을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식물의 셰계만이 물질적인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원한 삶을 보장해줄 수 있다. 부활에 대한 모든 신앙은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식물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자크 브로스, 《식물의 역사와 신화》 89쪽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식물의 '부활'은 보면 볼수록 놀라운 일입니다. 가혹한 추위 속에서 죽은 듯이 보였던 식물들이 따뜻한 봄이 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부활'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놀라운 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식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입니다.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무기물을 유기물로, 무생물을 생물로, 비활성 물질을 생명체로 바꾸는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는 씨앗의 질적 변화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식물의 생명력과 자연의 순환의 원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눔이라는 기적


예수의 생태적 관점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 속에서 구현된 것입니다. 예수의 생태적 관점은 이 세상 속에서 나눔의 원리를 몸소 실천하고 모범을 모임으로써 더욱 큰 힘을 갖게 됩니다. 복음서에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의 힘을 보게 됩니다.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 먹도록 농가나 근처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시자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가 가서 알아 보아라"하셨다. 그들이 알아 보고 돌아와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을 풀밭에 떼지어 앉게 하라고 이르셨다.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리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를 주워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먹은 사람은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 마르코 6장, 35~44절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알려져있는 이 대목을 어떤 신학자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새로운 해석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나눔의 모범을 보이자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떡과 물고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기 시작했고 나눔의 기쁨은 점점 커져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천 명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목격한 기적은 바로 나눔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실천이 모여 큰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그 뒤에 계속 이어지는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나 병자를 고치신 기적보다도 훨씬 의미있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하여 자연과 생명이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자연의 통곡소리를 우리는 '재앙'이라고 이야기 하지요. 주객이 전도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에게 인간은 이미 '재앙'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진정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할 때입니다.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 루가 12장, 33~34절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나누던 예수의 모습. 공유와 나눔의 패러다임. 그것이 바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생태적 삶의 규범이 아닐까요?



함께 읽는 책 No. 08

프란츠 알트(2003), 『생태주의자 예수』

자크 브로스(2005), 『식물의 역사와 신화』

게리 윌스(2007),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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