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존중을 위한 거리두기
함께 읽는 책 No. 42
전소정(2019), 『적당한 거리』
할아버지가 기르는 식물은 왜 항상 싱싱해요?
아마 내 손가락이 초록빛 손가락이어서 그런가 보다.
초록빛 손가락이라고요? 할아버지 손가락은 전혀 초록색이 아닌 걸요.
너한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초록색이란다. 식물한테는 보이지. 초록빛 손가락은 식물을 키우는 재능을 말하는 거란다.
아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나도 초록빛 손가락을 갖고 싶어요.
물론 가질 수 있지. 너는 식물을 소중히 여기니까 네 손가락은 벌써 옅은 초록빛이 되어 있을 게다.
-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신기한 식물일기』 중에서
『신기한 식물일기』의 주인공 리네아는 잎사귀와 꽃과 씨앗을 좋아한다. 도시에 사는 리네아는 자신을 숲에 피는 꽃이 아니라 아스팔트에 피는 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파트에 살고 있는 리네아의 방은 언제나 식물로 가득 차서 푸르름이 넘친다. 리네아는 식물이 언제 물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흙을 만져보면 알 수 있다. 차갑고 축축하면 물이 필요없고 바싹 말라 있으면 물을 주어야 한다. 화분을 두드려 봐도 알 수 있다. ‘땅땅’하고 소리가 나면, 화분 속의 흙이 말랐다는 증거다.
전소영의 『적당한 거리』를 읽으며 『신기한 식물일기』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작가의 모습이 꼭 리네아 같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작가는 초록빛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책장을 넘기는 나의 손가락까지 옅은 초록빛으로 물드는 듯하다. 초록빛이 흩뿌려진 책장을 넘길 때마다 로즈마리와 라벤더와 페퍼민트가 향기를 내뿜는다. 전작 『연남동 풀다발』을 통해 홍제천 들풀에서 배운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던 작가가 이번에는 ‘적당한 거리’에 대한 책을 썼다. 적당한 거리란 무엇인가?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거리다.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심리적 거리다. 지구를 위하는 마음의 거리다.
그렇게 모두 다름을 알아가고 그에 맞는 손길을 주는 것.
그렇듯 너와 내가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
인간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적당한 거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아니, 깨달아야만 했다. 작가가 전작 『연남동 풀다발』에서 말했듯이, 씨앗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땅에서 자라난다. 사실 씨앗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다. 누군가와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의 세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세계의 타자성과 고유성에 내 삶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포용하고 공존하는) 공동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란 자연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즉 사물의 세계와 존재들의 세계 모두를 가리킨다. 지구와 지구상의 모든 것, 그리고 지구에서 마주치는 다른 인간 존재 모두를 의미한다. 당신과 나 사이를 비운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다.
한 발자국 물러서 보면
돌봐야 할 때와 내버려 둬야 할 때를
조금은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