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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EGGIE Dec 09. 2022

무지개로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사람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게 하고 상징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인터뷰한 내용

 몇 해 전 서울에서 ‘Sun Rose’라는 전시를 했다. ‘Sun Rose’는 햇빛을 닮은 노란색을 촘촘히 쌓아 올려 밝은 대낮을 표현한 작업이었다. ‘Sun Rise(일출)’를 ‘Rose’라는 과거로 변형하여 ‘해 장미’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는 제목을 지었다. 햇빛을 받은 생물이 덩어리 지어 자라나거나 뿌리를 내리듯 그려진 형상은 현실 속 존재하는 것들에 대응하는 독특한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그림이 하나로 해석되길 방지하고자 제목 이외에도 다양한 장치를 두었다. 그림 속 사람의 그림자를 없애거나 중력을 무시한 풍경들을 묘사했다. 감상자가 현실과 동떨어진 감정을 느끼게 했다. 나는 밝은 여백과 대조되는 복잡하게 뒤얽힌 묘사가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리라 믿었다.


Sun Rose VI


“위아래가 뒤바뀐 세상 같아 불안한 감정이 드는데, 밝은 노란빛 때문에 따뜻한 느낌도 들어요.”   
“달리의 그림처럼 흘러내리는 형상들이 마치 햇빛에 녹아내리는 것 같아요.”
“멀리서 보면 노란빛 덩어리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이 와글와글하며 살아있어요.”
“빛을 머금은 존재가 무언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걸까요?”
“밝은 노란색이 가볍게 떠 있는 느낌을 줘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고개를 기울이며) 어느 쪽에서 봐도 말이 되는 것 같아요.”
“작가님 작품은 매번 볼 때마다 다르게 보여요. 그저 밝은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봤을 때 못 봤던 것들이 계속 나타나요.”


 사람들은 색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고, 그 후 조금씩 형태나 움직임에 집중해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었다. 나 이외의 사람들이 색과 상징물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무지개색으로 나를 그려보는 시간’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무지개색 크레파스를 나눠주고 하얀 종이에 ‘나’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모임이었다. 주말 한낮, 카페 한켠에 12명의 사람이 모였다. 어른들이 카페에 앉아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떨어져 바라보니 아이들처럼 보였다. 저 어른을 가장한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너무 궁금했다. 다들 집중력이 대단해서 아무 말 없이 그리기에 몰두했다.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따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처음엔 다들 망설였지만 그림을 두고 이야기하는 순간부터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그중 두 명의 그림과 속에 담긴 이야기에서 발견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흥미로웠다. 둘은 전공 분야와 살아온 환경이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해온 여성 공학도와 한국에서 활동하는 남성 디자이너였다. 둘의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은 같았다. 무지개 전체를 하늘 위 멀리서 내려다보면 동그란 모양이라는 과학책 속 이미지였다. 그 이미지를 시작으로 둘은 다른 그림을 그렸다.


 공학도는 모임 며칠 전 실제로 무지개를 봤다. 그가 본 무지개는 생각과 달리 매우 흐릿하고 색도 모호했다. 어른이 되고 본 무지개는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려야만 떴다. 검은 먹구름의 이미지가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무지개의 모양조차 가려진 동그란 원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의 관점의 한계를 알았다. 그 후의 무지개는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모호함의 상징물이 되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반쪽짜리 무지개를 그리려다 과학책에서 배운 동그란 무지개의 존재에 믿음을 가지자 마음먹었다. 나머지 반원을 이어 그려 완성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눈과 손을 그렸다. 눈을 지나는 쪽의 무지개가 그의 커다란 두 눈을 꽉 채웠고, 그 아래 활짝 펼친 두 손 주변까지 이어져 동그랗게 그려졌다. 눈과 손을 제외한 무지개의 주변을 듬성듬성 검은색으로 칠했다. 비록 현실에 어둠, 혹은 한계에 가려진 무지개가 떠올라도 그의 눈과 손은 여전히 빛났다. 어두워진 주변의 무지개로 인해 더 선명해진 자신을 그렸다.


 디자이너는 과학 도서를 읽은 후,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려져 있는 나머지 무지개를 상상했다. 그는 언젠가 우주로 날아가 크고 동그란 무지개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멀리 있는 아름다운 진실을 찾아 떠나는 상상을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초등학교 때 눈이 나쁘지도 않았는데 엄마에게 부탁해 도수 없는 화려한 빨간 안경을 사서 끼고 다녔다. 안경을 끼면 자신감이 생기고 모든 것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디자인 일을 하다 보니 정말 눈이 나빠져 안경을 껴야만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안경은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론 안경이란 테두리에 갇혀 모니터 속 아름다움만 바라보게 되었다.


 그림엔 갈색과 검정이 섞인 투박한 뿔테 안경이 그려졌다. 안경 속에 무지개를 채우다 그는 ‘색안경 낀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색안경을 끼고 있어 진실한 색을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안경 안에 갇혀 잘린 부분만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도 했다. 종이의 칠해지지 않은 여백과 작은 안경 속 잘린 무지개를 비교해보니 더는 못 보고 있는 것이 얼만큼인지 느껴졌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지개는 둥글다는 과학적 사실에서 시작해 어린 시절의 마음과 현재의 앎을 버무려 표현됐다. 결과물에서 느껴지는 감정 또한 달랐다. 공학도는 먹구름에 가려진 회색빛 무지개를 그렸다. 그러자 그림 속 눈과 손이 더욱 밝고 선명해졌다. 디자이너는 커다란 여백 속에 현실적으로 묘사된 평범한 안경과 화려한 무지개를 함께 그렸다. 무지개의 의미가 개인의 경험에 의해 변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모임에서 무지개 그리기가 색과 모양으로 마음을 보이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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