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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나 Sep 01. 2024

우리 할배 (2)

나의 할아버지이자 나의 아버지

우리 할배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는 날 치료를 거부하셨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께서 방사선치료라던지 항암치료를 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그때 우리 할배는  " 치료를 하믄 낫습니꺼?"라고 의사 선생님께 물었고, 낫지는 않지만 연명을 할 수 있다는 의사의 답변에 "그라믄 내는 안할랍니다. 가족들 고생시키고 병원에서 죽는 거보다 집에서 그냥 지낼랍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폐암 말기는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결국은 나중에 본인이 병원에 가자고 한다고 하시며 당장은 환자분의 의사대로 집에서 생활하라고 하셨단다. 하지만 우리 할배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병원에 입원 한 번 안 하시고 돌아가셨다. 틈틈이 할매가 "당신 안 아프나?"라고 물으면 "그냥 감기처럼 우리~하게 아픈데 괘안타"라고 말씀하셨다.


할배의 병세가 악화되고 누워계실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한 번씩 할배에게 물을 드리거나 주물러 드리는 날들이 있었는데, 내가 주무르면 "니 손 아프다~ 그만해도 된다. 안 아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우리 할배인데 그때의 나는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면 나는 쾌쾌한 냄새에 자주 들어가지도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조금만 더 곁에 있을 걸, 말벗이라도 되어드릴걸... 후회와 죄책감이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았다.


병세가 악화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할매가 친척분과 함께 할배 묫자리를 알아보고 할배에게 "방금 방신 묫자리 보고 계약하고 왔다"라고 하니 "수고했다~"라고 한마디 하신 후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중학생이었지만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은 나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멍~한 상태로 보냈다.(우리 할배의 장례는 집에서 지냈다. 그 당시에는 집에서도 장례를 치르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그러다 할배의 관이 장의차에 실리고, 이제 할아버지가 계시게 될 공동묘지로 향했고, 할배의 관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무너졌다. 안된다고 소리치며 관 위로 흙을 덮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때서야 실감했던 걸까? 이제 다시는 우리 할배를 볼 수도 없고, 할배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것을..... 주변에서는 "니가 그라믄 할아버지가 눈에 밟혀서 좋은데 못간다~"라고 하며 나를 데리고 할아버지의 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모두들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우리 할매는 나에게 늘 이야기하신다. "느그 할배가 조금만 더 살아있었음 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을긴데..... 니 자랑 많~이 하고 다닐 긴데...."라고... 요즈음 자주 우리 할배가 보고 싶다. 조금만 더 오래 사셨음 내가 받았던 사랑의 손톱만큼이라도 사랑을 갚아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할배!!!!! 내가 한 번도 제대로 얘기 안 했는데 진짜 진짜 많이 사랑하고 존경한데이.

꿈에라도 자주 나오믄 안 되나?? 너무너무 많이 그립고 보고 싶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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