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랑연두 Feb 20. 2024

입사 삼일차에 워크숍 진행을 하라고?

 사내 정치싸움의 한가운데에서 고군분투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어이가 없습니다.


입사 첫날 인사 담당자와 IT담당자는 휴가였고, 전임자는 오후부터 병가를 내고 잠수를 탔죠. 그런데 이튿날인 화요일, 법인장님은 저를 불러서 

수요일에 유관 부서과 워크숍을 하잡니다.

가능하면 저보고 "리딩"을 하라면서요.


전임자는 잠수를 탔고 인사팀 대행을 하는 급여 담당자가 이제서야 온보딩 스케쥴을 짜서 저에게 넘겨준 상황인데 말입니다.  팀의 구성원이라곤 다른 업무를 겸직하는 6개월 된 신입사원이 전부였기 달리 도움받을 곳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신입사원과 IT담당자의 도움을 받아 노트북을 받아 세팅을 한 뒤 회사메일에 접속하고 ERP와 같은 회사 내외부의 시스템에 접속 권한을 요청하기 시작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업무에 필요한 모든 시스템의 접속권한이 생긴 건, 무려 3개월은 지난 뒤였죠. 그리고 전임자는 끝까지 업무인수인계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매출이니 사이트의 트래픽을 제대로 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 3개월 후까지는 맨땅에 헤딩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삼일차에 워크숍 리딩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건 기존에 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계열사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사실 같은 그룹에 속해 있던 제 전 직장도 그 계열사에 광고 업무를 맡기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광고주와 에이전시의 역할에 맞게 행동했기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상하게도 그 계열사의 모든 직원들은 에이전시라는 단어를 극도로 거부하며 마치 같은 기업인 것처럼 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같은 목표를 갖고 챌린지를 당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죠. 또한 당연히 다른 회사이기 때문에 예산이나 결재 같은 건 별도로 운영되었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광고주가 딱 하나밖에 없이 운영되고 있으니 한국 같으면 일감 몰아주기로 신고당하기 딱 좋은 기이한 구조였습니다.


첫날 오후 늦게 법인장님이 저를 불러서 하셨던 말씀이 그 계열사의 '지점장'을 잘 이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지에서 채용된 전임자와 달리 그의 보스인 지점장님은 한국에서 파견된 주재원이었으니까요.


이튿날, 저는 지점장님에게 같은 한국인인 장점을 살려 가볍게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편하게 대화를 시작한 저에게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제 면접을 본인이 봤어야 한다고. 제가 한 온라인 사이트 업무는 원래 그 계열사에서 담당하는 거라면서요. 하지만 그분과 저는 같은 회사 소속도 아닌지 않습니까.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일을 주고 비용을 지불하는 회사의 직원과 비용을 받아서 요청된 업무를 하는 회사의 직원 관계, 광고주(갑)와 에이전시(을)죠. 근데 을이 갑의 직원을 뽑는데 자기랑 관련된 일이니 자신이 면접을 봐야 한다니 얼마나 어이가 없습니까.


이 상황이 의아해서 법인장님에게 물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셨네요. 저는 법인장님 직속이고 그 계열사는커녕 같은 회사에 다른 누구도 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지점장님의 생각은 달랐던 게 이해는 가더라고요. 현 법인장님이 부임한 지 고작 8개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전 법인장님은 그 계열사를 같은 회사의 부서처럼 세팅을 해놨던 탓이죠. 하지만 현 법인장님은 철저히 다른 회사라고 생각했고 궁극적으로는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지점장님은 저에게 법인장님이 궁극적으로 그 계열사와 일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본인에게 대놓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렇게 들으니 그 지점장님에게 저의 입사는 지점의 입지를 줄이기 위한 첫 신호탄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입사하기 전에 이미 법인장님은 저에게 지금은 온라인몰 팀장이지만 몇 년 안에 그 지점에서 하는 일을 모두 가져와서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는 걸 제안했으니 지점장님의 불안감이 사실 근거 없다고는 할 수 없었죠.


결국 저는 열심히 온라인 사업 키우겠다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두 회사 간의 정치싸움 한복판에 떨어졌던 겁니다. 그것도 아무런 보호장치도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말이죠. 결국 입사 삼일 만에 이뤄진 워크숍이 첫 정식 결투였네요.

 



하지만 저는 십여 년 동안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한 K-직장인이 아니겠습니다. 비록 불평은 할지언정 까라면 까야죠.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워크숍을 영어로 진행하는 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대신, 화요일저녁부터 수요일 아침까지 밤을 새워 발표를 준비했습니다. 회사의 온라인몰과 경쟁사들의 온라인몰을 고객 구매여정에 따라 트래픽-제품상세페이지-장바구니-결제-전환(구매완료)까지 총 5단계에 맞춰 분석한 내용으로 말입니다.


사실 회사의 사이트는
굳이 단계를 나눌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명색이 온라인 쇼핑몰인데, 행사페이지든 제품 카테고리든 상관없이, 구매가능한 제품을 보려면 최소 세 번은 페이지를 내려가야 했거든요. 배너는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밑에 중복된 내용을 가진 또 다른 배너가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고객은 아예 제품을 볼 수조차 없었죠. 하단의  "다음" 버튼을 클릭하면 겨우 제품을 볼 수 있는데 그 제품들마저 품절이거나 구매 불가인 상황. 이건 물건을 사라는 간지 말라는 건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홈페이지가 pc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탓에 글씨는 작아 가독성과 가시성은 떨어졌습니다. 이미 온라인쇼핑이 모바일로 넘어간다고 들은 게 십 년은 된 거 같은데 말이죠. 또한 구매를 자극하는 장치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다가 사이트는 어찌나 느린지.. 조금 과장하자면 모뎀시절이 생각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밤새 저는 이런저런 인사이트를 담아 발표자료를 만들었고 회사에서도 오전 내내 그 자료를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드디어 워크숍이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워크숍에 앞서 저는 양해를 구하고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Low hanging fruit"(쉬운 것부터)라는 내용을 시작으로 하여, 회사와 경쟁사를 구매여정별로 캡처해서 만든 이십여 장의 장표를 이용해 우리가 무엇을 개선하면 좋을지 이야기했습니다.


발표가 끝나자 계열사 소속 사람들은 지금 홈페이지가 왜 그렇게밖에 운영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것들을 개선해야 한다는 사실은 반박할 여지가 없었죠. 수고했다는 말에 뒤이어 본격적인 워크숍을 시작했습니다.


법인장님은 저희 팀 신입사원을 시켜서 이 파일 저 파일을 열게 하시더군요. 그러더니 당장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에 맞게 해당 내용을 업데이트하라시네요.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파일인 건 당연하고, 모인 사람들조차 몇 개월 전에 만들 때 보고 처음인 파일을 말이죠. 당연히 사람들은 법인장님 마음에 차는 답변을 즉각 즉각 해낼 수 없었기에 혼나는 듯한 어색한 분위기로 워크숍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전 03화 담당자의 잠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