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은 첫 주가 지났습니다. 인수인계도 없고 제대로 된 온보딩프로그램도 없이, 사내정치싸움의 한가운데에서 몸빵을 하면서 말이죠.
입사 첫 주의 키워드가 잠수와 워크숍이라면, 두 번째 주의 키워드는 회의와 파워포인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주, 워크숍에 이어 법인장님이 저에게 준 두 번째 미션이 바로 각 부서들과 하는 주간 회의 스케줄을 짜오는 것이었거든요.
이 두 번째 미션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효율적인 업무시간 배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3개나 되는 제품카테고리별 제품팀+영업팀, 물류, 서비스, 마케팅, 매출 분석, 홈페이지 데이터 분석, 영국법인에게 노하우(?) 전수를 받기 위한 미팅 시간까지.. 총 9개 정도의 미팅의 주별 시간표를 짜와야만 했습니다. 거기에 기존에 원래 하던 법인 주간 회의와 온라인몰 주간회의까지 하면 총 11개. 이 중에 제가 주관해야 하는 회의가 무려 10개였습니다.
산술적으로 회의를 한 시간씩만해도 총 11시간, 앞 뒤로 회의준비며, 회의 준비 및 팔로워업을 한 시간만 한다 해도 총22시간이 걸리는 스케쥴. 이렇게 되면 40시간 근무시간 중 절반 이상이 회의를 하고 준비하는 시간으로 지나가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모든 회의를 매주 하는 게 비효율적이라서 격주로 하는 걸 법인장님이랑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미팅은 미팅을 위해 따로 자료를 만들 필요가 없다. 그냥 평소에 돌아가는 상황을 보는 파일을 같이 보면서 진행사항을 함께 체크하는 거인데 무슨 시간이 많이 필요하냐, 회의를 취소하긴 쉬워도 사람들 만나도록 시간 잡는 일은 쉽지 않다. 내가 그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네.. 물론 제가 회의만 들어가면 되는 진짜 팀장이었으면 그랬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저와 같이 일을 해줄 있는 인원 고작 0.5명. 가뜩이나 넘치는 실무를 최대한 저도 나누어 해야만 하는 상황인데 일주일에 20시간을 온라인몰 업무에 쓸수 있는데 그걸 죄다 회의를 다니는데 쓰게 만드니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그나마 관련 있는 부서끼리 회의를 합하고, 당장 필요 없는 회의들을 줄여나간 덕분에 제가 퇴사할 때 법인내에서 하는 주간회의는 7개로 줄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한국본사와 유럽지역본부가 함께 하는 월례회의 및 그 준비 회의를 비롯해, 결제대행업체와의 월례회의, 파이낸스 팀과의 비정기적 회의, 홈페이지 유지보수 업체와의 격주회의 등등 수많은 회의들이 저의 업무시간을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업무 파악과 시스템 익히기, 그리고 각종 사고 수습과 행사기획 운영, 그리고 계획제출까지.. 일은 많은데 정규 업무시간을 회의로 잔뜩 채워놓으니,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 야근과 주말근무를 안 할 수가 없었네요. 물론 저에게 누구도 밤늦게까지 또는 주말에 일하라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라는 건 많고 아는 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시간이라도 투자해야지.
이 주간회의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바로 회의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하라고 해서 사람들을 모아서 만나기는 했는데, 하나같이 저한테 “이 회의는 뭐 하기 위한 회의야”라고 묻네요. 입사 2주 차, 각 팀이 무엇을 하는건지 내 업무가 무엇인 건지공유받지도 못 한 제가 도리어 묻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그 회의가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던 것이 원래 온라인몰을 하던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법인장님이 임의로 이름을 적어서 회의에 초대된 사람들이었던 탓입니다. 뭐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모으라고 시켜서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회의를 리딩해야 하는 이 알 수 없는 상황. 참여하는 사람들도 왜 하는지 모를 이 회의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서 호의적이지 않고, 이 일이 잘 된다 해도 할 일만 늘어나지 자기한테 이득도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더 방어적이 되어 시작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늘 까라면 까는 k-직장인이지 않습니까. 결국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본사에서 새로 받은 내년도 목표와 법인장님이 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고 싶은지에 대한 계획을 공유하며 어찌어찌 고군분투를 했었네요.
그 와중에 입사 2주 차 금요일에는 유럽지역본부에 제가 담당하고 “온라인몰사업“에 대해 보고시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현황과 계획이 들어가야 하는데, 저는 계획은커녕 현황파악도 제대로 못 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다행히도 그 발표의 주체는 각 법인의 법인장들이었네요. 다른 법인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저희 법인은 법인장님께서 직접 발표자료를 만드시더라고요. 근데 그 자리에 제가 왜 필요했던 걸까요? 수요일 4시인가 4시 반이었나.. 저는 법인장님 방으로 불려 갔습니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파워포인트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전 회사에서 연구소로 입사해서 마케팅으로 퇴사할 때까지 십여 년 동안, 수많은 파워포인트를 만들었습니다. 5개년 계획부터 신제품 제안 또는 소개, 홍보계획, 영업정책까지 아주 다양하게 말이죠. 근데 퇴근시간이 얼마 안 남은 저를 붙잡고 파워포인트 쓰는 방법을 알려주시네요. 솔직히 좀 어이가 없긴 했습니다. 도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싶어서요. 근데 이제 와서 보며 저를 자신의 미니미를 만들려는 계획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왜냐하면 그 파워포인트 수업이라는 게 발표자료를 만들면서 본인의 장표스타일을 알려주는 거였거든요. 예를 들면 표를 만들 때는 오른쪽, 왼쪽 테두리는 지우라면서 테두리 지우는 법을 알려주고, 위아래 여백은 0, 오른쪽 왼쪽 여백은 0.3~0.5로 하라며, 여백 변경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한글과 영문별 글씨체도 지정해 주고 글씨체 찾는 방법 알려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요일과 목요일 저는 저녁도 못 먹고 8시 가까이까지 회사에 붙잡혀 발표자료 만드는데 옆에 서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네요.
하지만 금요일 보고시간, 그렇게 만든 발표자료는 절반도 다 발표를 못 한 채 혼나기 시작했습니다. 완전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서 유럽 지역 대표님한테 혼나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덩달아 담당자인 저까지 호출되어서 “xx법인장이 아직 온라인사업을 잘 몰라서 그냥 오프라인 사업하듯이 그렇게 하면 될 거라 생각해서 그러는데 a팀장 생각에도 이렇게 하면 목표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라시네요. 제가 도대체 뭐라고 대답할 수가 있었을까요? 하지만 대답을 안 하고 있으려는 저에게 재차 의견을 물어보셔서 “온 지 안 되어서 잘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하나마나한 말을 했고 대표님은 법인장님에게 한참을 뭐라고 하셨네요. 그때 다른 법인들의 발표를 듣는데, ”아뿔싸 저는 수요일 목요일 저녁도 못 먹고 뭘 하고 있었던가 “ 싶더라고요. 다른 법인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렇게 다양한 쪽에서 매출기회를 만들고 경쟁력을 키우겠다고 하는데, 저희 법인은 담당자들과 각각 주간 정기회의를 하고, 다양한 프로모션을 기획해서 매출을 늘리겠다고 원론적인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달리 말하면 담당자들 쪼고 행사 많이 하겠다는 얘기였던 건데, 사실 온라인 사업은 유입해서 어떻게 떠나가지 않고 결제까지 하게 만들지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그 내용이 쏙 빠져 있었던 거죠.
금요일 5시. 회의를 마치고 난 저는 꽤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왜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발표자료의 내용을 받아들였을까, 왜 발표자료를 만들 때 방향성에 대한 유의미한 인풋을 주지 못 했을까. 유럽 대표님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을까?’하는 자책으로 주말을 채우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호의적이지 않다고 또는 내용을 잘 모른다고 물러서 있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업무를 파악하고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