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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Mar 19. 2024

시스템이 날 거부한다

끊임없는 승인 요청과 권한부여와의 싸움

이거 일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예전 회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긴 했습니다. 두 번의 육아휴직 후 복귀했을 때, 직무를 바꿔서 새로운 팀으로 갔을 때 말이죠. 시스템 접속 권한이 없어 일을 못 하는 상황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적어도 하루이틀은 환경 세팅하는데 보내곤 했죠.


근데 여긴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일단 권한신청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 너무 많았습니다. 거의 20개 정도?권한 요청하는 시스템만도 두 개였는데  여기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결제를 올려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각 시스템별로 권한신청 방법도 제각각이라 어떤 건 결재를 올리고, 어떤 건 권한 요청 시스템에 들어가서 요청을 하고 어떤 건 담당자에게 결제완료 화면을 캡쳐해서 메일을 보내고, 또 어떤 건 구글 폼 링크로 들어가 요청하는 정보를 기입해줘야 했네요. 필요하다는 시스템 명은 받아놨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는 매뉴얼은 없어서 여기저기에 물어가며 겨우겨우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권한을 요청해서 승인되어도 막상 들어가면

접속 권한이 없다


는 메시지가 뜨기 일쑤였습니다. 이거 진짜 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어떤 시스템은 제 아이디가 해당 시스템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어떤 시스템은 시스템 접속 후에 특정 메뉴에 대한 권한은 별도로 받아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역시 없었습니다. 시스템에서 보여주는 정보는 고작 "권한이 없다" 뿐이었으니까요. 접속이 안 되면 그때부터 문제해결해 줄 담당자를 찾아 나서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죠. 때로는 그 담당자가 법인이 it 담당자이기도 했고 본사의 시스템 담당이기도 했고, 또는 여러 개의 외주 업체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담당자를 찾기까지 발로 뛰고 수많은 이메일이 오고 갔죠.


시스템 권한 신청 방법과 문제 해결방법을 찾는 것도 직원의 몫이었던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저희끼리 이게 또 다른 입사관문이라며,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걸 보여주려면 이 퀘스트를 완수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유럽법인 담담자에게 이런 고충을 토로했더니 " 대기업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시스템 권한 받고 익숙해지는데 6개월 정도 걸리더라"라고 하시더라고요.


한국과 외국회사를 다녀본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디든 새로 들어갔을 때 아무리 잘 알려주려고 해도 환경세팅하는 게 쉽지 않지만 둘의 차이점은 불편한 것을 고치려고 하는지 아닌지였다고 하더라고요. 한국회사에선 "나도 예전에 그랬어" 라며 그 어려움을 빠르게 해결해 내는 걸로 그 사람의 업무 능력을 가늠한다면, 외국회사에선 "다음 사람이 같은 불편을 겪지 않도록 네가 불편했던 건 뭔지 알려줘.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도 같이 알려주면 크게 도움이 될 거야" 라며 매뉴얼을 업데이트해 새로운 사람이 빠르게 조직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한다네요.




여기에 와서 신기했던 게 스웨덴에서 만들어지는 정보들을 본사에서 더 잘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법인에서는 스웨덴 홈페이지에 가입된 멤버 수와 마케팅 정보동의한 사람 수를 모르는데 본사출장자는 그걸 알고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걸 볼 수 있는 별도의 시스템이 있는데 법인에서는 아무도 그 시스템의 존재를 몰랐던 거죠. 비슷한 일은 끝도 없이 많았습니다. 제 팀원은 입사 후 줄곧 홈페이지의 제품가격을 업데이트하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하루는 제품 가격 변경 히스토리를 물어봤더니 새로 가격을 올리면 기존 가격이 지워져서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갔죠. 아무리 그래도 대기업인데, 매출과 직결되는 가격데이터를 저장하지 않는다고? 결국 접속 권한을 받은 제가 product price history라는 메뉴를 찾아 알려주었네요.


수많은 정보와 시스템에서 고군 분투하며 결국 필요한 모든 시스템에 접속해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3개월이 걸렸습니다. 사용법을 스스로 익히기 위한 자발적 야근과 주말근무, 그리고 각 시스템을 관리하거나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염치 불고하고 물어본 덕분에 그나마 기간을 줄인 건데도 말이죠.

 

그 와중에 제일 메인으로 쓰는 시스템은 어찌나 느린지 1분씩 멈춰있는 경우가 허다했죠. 어떤 시스템은 접속자수를 제한한다고 기다리래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세션 종료로 튀어나가지더라고요. 그리고 온라인판매를 위해 기존 시스템과 새로운 시스템들을 얼기설기 연결해 놨던 탓에 문제가 생겨도 제대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너 개의 시스템에서 각각의 정보가 제대로 올라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네요. 모두 다 제대로 되어 있으면 그다음에는 시스템의 테크니컬 이슈이니 시스템 유지보수 담당자에게 연락해야 했거든요. 잘못된 가격이 버리거나 주문이 안 되는 이슈는 진짜 자주 발생했는데 놀랍게도 원인이 다양했습니다. 문제 원인에 따라 해결까지는 짧게는 하루 길게는 한 달 이상을 끌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매출목표는 전년대비 두 배라니 참.. 쉽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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