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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Mar 26. 2024

인수인계는 없나요?

파일 두 개가 끝?!

끝까지 보고도 못 하고 혼나는 걸 본 2주 차 유럽지역대표님 보고 후, 저는 주말 내내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뭐가 잘 못 된 걸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비록 전임자가 내가 온다는 사실을 몰랐고 정치싸움에 한가운데 떨어졌을지라도, 사람과 시스템이 모두 나를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라도.. 여기서 포기하고 물러서는 건 싫었습니다. 잔뜩 엉킨실타래라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하나 풀면 결국 풀리리라. 마음을 다 잡으면서요.


엉킨 실타래라도 하나하나 풀면 비록 자국은 남더라도 풀리리라.. 회사생활을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풀었던 아이들 장난감.


그렇다고 지금처럼 모르는 채로 여기저기 뚜드려 맞으며 배울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전임자가 껄끄럽더라도 "인수인계"는 받아야겠다, 월요일 아침에 가면 그것부터 얘기하자 생각했습니다.


1주일간의 잠수 후에 돌아온 뒤 1주일 동안 어색한 인사만 나누고 미팅에서만 본 그에게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했습니다. 보고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너에게 인수인계를 받아서 빨리 정상적으로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죠. 전임자는 저에게 자신의 현재 상황과 기분을 이야기하면서 법인장님 처사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쨌든 '일은 일이니까' 자신은 저의 발목을 잡지 않고 일이 될 수 있도록 서로의 R&R(role and responsibility 업무분장) 안에서 잘 '도울'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는 잘해줬을까요?


회사에서 보면 항상 '잘 포장하고 잘 둘러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도 그랬습니다. 인수인계요청에 "도움"과 "업무분장"을 얘기했던 그. 어찌 보면 그럴싸해 보이는 그 말의 숨은 뜻은 "넌 여기까지만 해, 내 자리 침범하지 마. 그러면 나는 너에게 해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내가 도와줄게"이었던가 싶습니다.


그에게 "선량한 도움"이어서인지 요리 빼고 조리 빼서 어렵게 잡은 인수인계 미팅시간에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잠깐만 잠깐만을 하다가 1시간 반을 옆에서 대기 타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다른 날 겨우겨우 만난 미팅에서는 그의 팀 사람들과 저희 팀을 넣어 만든 R&R파일을 꺼내 설명을 해주네요.

너는 온라인 스토어 매니저야. 프로모션이랑 매출 챙기고, 월 1회 유럽정기 미팅 가고 보고용 자료 만들면 돼,
나는 디지털마케팅 매니저고, 디지털 광고는  우리 팀에서 알아서 할 거야
이미 법인장님한테도 다 보고된 거야..
서로의 업무 영역을 존중해 줘.


그러면 예전에 프로모션이랑 매출, 보고했던 자료들 정리해서 보여주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좀 알려줘


자료들은 여기저기에 있어서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 같아.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하지만 그게 끝이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의 업무분장 설명.



사실 그에게 인수인계 요청했을 때 도움을 받을까 해서 그의 보스인 '지점장님'한테도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법인장님이 전임자는 좀 마음이 상해할 수 있으니 지점장님을 최대한 이용하라고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전임자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같은 사무실에 계속 있는데 인수인계가 왜 필요하냐,
모르는 거 있으면 당신 밑에 있는 팀원한테 물으면 되지.
전임자랑은 인수인계가 아니라 컨센서스(의견일치)를 해야지.


같은 팀에서 업무분장만 바뀌어도 기존에 하던 업무 설명해 주고 컨택포인트랑 기존 자료들 넘겨주는데, 새로 들어온 사람한테 인수인계가 왜 필요하다니요. 그리고 제가 신입사원 포지션으로 온 게 아닌데 들어온 지 6개월 된 제 팀원한테 인수인계를 받다니요. 팀장 역할이면 팀장 역할의 인수인계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지점장님에게 인수인계 잘하게 신경 써달라고 말을 꺼냈는데 인수인계가 왜 필요하냐니 황당했습니다. 전임자가 인수인계는 이미 해주기로 했다니 그제야 그럼 잘 됐네랍니다. 그러고 나서 대기만 타다 끝났던 첫 인수인계 미팅을 하려고 전임자의 자리로 갔는데 지점장님이 있더라고요. 제가 이제 인수인계 미팅해야 한다니까 둘이서 낄낄거리며 "컨센서스" 좀 하고 올 게라더라고요. 지점장님 도움을 받으라고 했었나요? 돕긴 뭘 돕다는다는 건지



결국 한 달 동안 제가 전임자에게 받은 건 딱 파일 2개. 처음에 보여줬던 업무분장표와 조르고 졸라 받은  3장짜리 "키워드 최적화 프로젝트" ppt 파일 이렇게요.


제가 디지털 마케팅 퍼포먼스 관련해서 자료를 요청했더니 그러더군요. 저에게 우리 업무분장 협의한 거 아니냐며 너는 온라인판매매니저지 디지털마케팅 매니저가 아닌데 왜 나한테 그걸 달라고 하느냐. "선"을 넘지 말아라고. 아니, 내가 다른 사이트의 자료 달라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물건 팔고 있는 그 사이트의 자료 달라는 건데 선을 넘지 말라니요. 나도 그걸 알아야 물건을 파는데 말이죠.


하지만 입사초부터 법인장님이 저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본인은 무조건 내 편을 들 거니까 힘든 거 있으면 자기를 팔고 최대한 자기를 이용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법인장님이 요청하셨다고 달라고 하니까 그걸 왜 '너'를 통해서 시키냐고 톤을 높이네요. 궁금하면 자기한테 '직접'시켜서 가지고 오라고 해야 한다며.


저의 보스는 법인장님이었고, 처음부터 온라인몰과 관련된 모든 권한은 저에게 준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근데 전임자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뭐 작은 거 하나부터 부드럽게 넘어가는 게 있을리가요.


결국 계속된 신경전 끝에 결국 법인장님을 찾아가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온라인몰 관련해서는 내가 총책임자 아니냐고 물으니 네가 책임자 맞답니다.  지금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해주고 업무협조도 전혀 안 된다고 이야기하니 바로 지점장님을 호출하네요. 필요한 파일들 모두 모아서 인수인계서에 파일 리스트 적고 전임자랑 법인장님 사인받아서 공유하라 시네요.


과연 저는 인수인계 파일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파일을 만들지도 파일을 전달하지도 않았고, 법인장님도 그 이후에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여기저기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다운로드하고 제가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 그들과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더군요. 생각보다 그들이 아는 건 얄팍해서 그럴만한 가치가 없기도 했고요. 오히려 제가 나올 때 그동안 밤새우면서 만들고 모아놓은 파일들이 들어있는 몇십 기가짜리 드라이브를 남기고 나왔네요.




맨날 불평불만만 이야기해서 다들 너무 못 됐다고 생각하면 또 그건 아닙니다.

저의 반쪽짜리 팀원은 비록 어설프지만 자기가 아는 모든 걸 저에게 알려줬고, 내부공사 때문에 어쩌다 옆자리에 앉게 된 주재원분도 툴툴거리면서도 회사 시스템이랑 회사약어, 회사 분위기 관련해서 많이 알려줬든요. 물류랑 오더팀에 왕언니 팀장님 둘도 궁금한 거 있을 때마다 노트북 들고 가면 친절히 설명해 줬고요. 마케팅팀 매니저도 급하게 홈페이지 문구 수정 필요할 때면 하던 일 멈추고 도와줬고요. 법인에서 잔뼈가 굵으신 파이낸스 팀 한국인팀장님도 회사 돌아가는 사정이며, 온라인 결제 및 매출과 비용 반영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죠.


그리고 한국에 있는 시스템 유지보수 업체며, 물류 협력업체 본부 온라인 관련 팀들의 담당자분들이랑도 많이 도움을 받았고요. 보이스톡이랑 줌으로 판매 물류시스템이며, 새로 도입되는 기능 관련해서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도 친절히 답변해 주셔서 업무 파악하는데 참 많이 도움이 되었네요. 나중에 나올 때 깜짝 놀라며 출장 와서 얼굴 볼 줄 알았는데 너무 아쉽다고 얘기해 주시는데 마음이 감사하더라고요. 어쩔 때는 한국 사람이 더 한 거 같기도 하다가도(지점장님도 한국분이거든요) 한국사람들이 또 정이 있지 싶기도 하고..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해 보면 한국사람이랑 일할 일 많은 해외법인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할 수만은 없으니 제가 이 글을 쓰고 있겠죠. 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다음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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