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법인에서 메일이 하나 왔습니다. 중소법인에게도 멤버스위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니 원하는 법인은 10월 중 언제 할지, 그리고 무슨 제품들을 얼마만큼의 수량으로 할지 내일까지 써서 달라는 것이었죠. 최대 제공가능한 예산이 얼마이며 ROAS(Return On Advertising Spend) 목표는 얼마라고 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사 페이지 만들기부터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돌릴 디지털마케팅까지 모두 유럽법인에서 책임질 거라네요.
그 메일을 같이 받은 법인장님이 부르더니, 좋은 기회라며 일정과 제품 모델명과 수량을 가져오랍니다. 메일을 받아도 아직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이 법인에서 무슨 카테고리를 취급하는지 어떤 제품이 어떤 계층구조(hierarchy)를 가지고 있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였고요.
급한 데로 6개월 차인 신입사원을 데리고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 달에 뭘 팔지에 대한 계획이 없더라고요. 그냥 그때그때 재고 가능한 제품과 할인율을 주재원들한테 받아서 팔고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갔을 때 회사의 온라인몰은 걸음마 수준이라 구매기능은 있지만 대부분은 할인사이트에서 할인쿠폰을 받은 뒤 링크를 타고 들어와 사는 정도였죠. 기본 가격은 정가를 올려놓으니 일반 고객은 거의 사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일반 고객 통해서 팔리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팔렸네 하는 정도였죠.
근데 유럽법인의 메일은 제휴사이트 할인 쿠폰이 아닌, 온라인몰 자체에서 가격을 낮춰서 판매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휴사이트를 통해서가 아니니 온라인몰 자체로 들어와야 하니 그 광고비용을 대주겠다는 것이었죠.
문제는 스웨덴 법인은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죠. 회사 공식몰에 트래픽을 유입해서 특가전 같은 걸 하는 걸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전임자를 비롯한 기존 멤버들이 모두 부정적이었습니다. 내용을 들어보면 이유들이 다 설득력이 있긴 했습니다.
첫째, 10월은 그 정도의 광고예산을 써서 행사를 하기에 좋은 달이 아니다.
모두 블랙프라이데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10월에 사냐. 그리고 지금 준다는 예산이 시장 규모에 비해 너무 많아서 효율이 안 나올 거다. 그럼 분명 나중에 왜 잘 안 되었냐고 챌린지 들어올 거다.
둘째, 블랙프라이데이랑 충돌을 피하려면 최대한 일찍 (10월 첫째 주?)해야 하는데 광고를 돌릴 이미지니 비디오를 만들기에 시간이 충분하지가 않다. 유럽법인에서 다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어디까지 거기서 한다는 거인지 모르겠다.
셋째, 다른 유통사와 충돌 때문에 분명 주재원들이 오픈 디스카운트가 힘들다고 할 거다. 가격이 싸야 사람들이 온라인몰을 들어와서 살 텐데, 만약 우리가 가격을 낮추면 분명 유통사에서 컴플레인 들어올 거다. 우리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유통사(한국으로 치면 하이마트)의 매출 비중이 비교할 수도 없이 훨씬 높은데 그 조금 매출하자고 유통사와의 관계를 안 좋게 하겠냐.
하지만, 이제 고작 2주일 차 직원이 안 된다는 내용으로 보고할 수 있을까요?
일단 유럽법인에서 다 알아서 하겠다니까 관련자들과 협의점을 어찌어찌 찾아서 일단 법인장님께 제품 목록과 수량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목표수량은 6개월 차 신입사원이 최근 매출 추이로 예상한 예상치였습니다. 보자마자 그래서 총매출이 얼만지를 물어보시네요. 더해보니 준다는 광고비 예산이랑 엇비슷하네요. 5만 원 광고 돌려서 5만 원어치 판다고 하면 누가 돈을 주냐시며 수량을 늘리랍니다. 재고가 가능한 양만큼으로 모두 다 올리니, 어떤 제품은 한 달에 팔았던 최대 양의 10배가 목표 수량이 되네요. 그제야 만족하며 그 내용으로 메일을 보내랍니다.
꼭두각시처럼 메일을 보낸 뒤 한참이 지나도 제대로 된 진행사항이 공유가 안 됩니다. 현지상황에 맞게 하려면 유럽법인에서 보낸 행사 스킴으로는 쓸 수가 없어서 이런저런 수정이 필요한데 말이죠.
한 2주쯤 지나더니 메일이 옵니다. 새로운 내용으로 말이죠.
1. 일정은 무조건 10월 중순부터 말까지.
참여하는 모든 법인이 동일한 기간에 할 거랍니다. 예전에는 10월에 원하는 때 하라고 했었죠.
2. 행사 스킴 모두 따라야 해.
특가 제품이랑 번들 프로모션 모두 다 하랍니다. 처음에는 재고나 다른 유통사 충돌 때문에 상황에 맞게 하라고 했었죠.
두 번째는 그렇다 쳐도 일정 바뀌는 건 너무 타격이 컸습니다.
첫째, 그 행사 때문에 원래 잡혀있던 행사를 취소했었습니다. 두 행사가 너무 붙어있는데 어차피 쓸 수 있는 재고는 한정되어 있었죠. 어차피 팔 거, 힘 실어주는데 쓰자 했는데 2주 넘게 연기라니.. 매출 펑크 나고 재고들은 장기재고로 넘어가게 생겼더라고요.
둘째, 블랙프라이데이 행사와 가까워졌습니다. 블랙프라이데이 자체는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지만 점점 더 일찍 행사를 시작하는 추세라 2주 전부터 이미 행사에 들어가네요. 그렇게 따지면 이 멤버스위크 행사를 끝나고 보름 후에 파격적인 행사가 시작하는 셈이 됩니다..
근데 뭐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본사랑 얘기해서 결정된 사항이라는데...
그렇게 결정된 뒤에도 뭔가 진행이 원활하지가 않았습니다. 유럽법인에서 모두 다 해준다고 했지만 실제로 많은 부분은 현지에서 해야 했지만 공유가 너무 늦었습니다. 판매 페이지며 광고 페이지에 들어가는 텍스트들을 업체 시켜서 번역을 해왔는데 어색한 번역투라 결국 현지에서 다시 했고, 번역한 텍스트를 사이트에 붙여보니 콘텐츠랑 따로 놀아서 오픈한 다음까지도 여러 번 수정했죠. 행사 페이지는 행사 오픈 3일 전인가 확인할 수 있었는데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기능들을 쓰게 만들어 놓은 탓에 각종 에러가 생겨서 그 거 잡느라 고생을 했습니다. 웹마스터는 썸네일 사진을 사이즈 맞는 게 없다고, 있는 거 그냥 올려서 썸네일이 찌부되어서 올라가질 않나, 카피 들어갈 부분이 텅 빈 채로 올리질 않나 여러모로 대기업 홈페이지 행사 페이지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근데 저만 바쁘더라고요.
월요일에 오픈하기로 한 행사가 행사페이지 에러 때문에 하루 이틀 계속 늦어지는데, 다들 순서를 지키고 절차를 지켜야 한답니다. 내가 썸네일에 맞는 사이즈의 jpg을 요청했으면 안 줬으면 나는 썸네일을 올릴 수 없고, 잘못된 게 있어도 다른 업무도 있으니까 그거 확인해서 고치는 데까지 워킹데이 하루는 필요하고.. 자료 다 준비해 와도 퇴근시간이면 내일 하자고 하는 게 스웨덴식 일처리라는 걸 처절하게 느꼈네요.
처음부터 유럽법인에서 다 알아서 하기로 하지 않았냐, 이건 그쪽 행사이지 우리 행사가 아니다, 걔네가 챙겨야 할걸 못 챙겨서 펑크 나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게
"상황은 알겠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데? 일은 되게 만들어야지"
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재에 문제 생기고 생산에서 불량이 나고 담당자가 아파도 늘 우리는 어떻게든 굴러가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사실 중소법인들의 멤버스위크를 모두 유럽법인에서 컨트롤한다는 것부터 무리한 시도였습니다. 지나고 보니 국가별 언어가 다 다르고 판매 제품이 다르고 동일한 플랫폼이지만 활용도가 다른 여러 개의 법인을 유럽법인의 한정된 인원이 모두 컨트롤한다는 게 사실 케파를 벗어나는 일이었더라고요. 하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배웠던 탓에 법인에서는 저만 동동거리며 퇴근해서도 전화를 붙들고 있었네요. 유럽법인의 한국인 현채인분과 통화를 하며 말입니다.
여기 와서 한국분들과 이야기해 보면 해외 이직했을 때 답답한 점 중 하나가, 난 한국인이고 빨리빨리 하고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야 하는데, 현지 사람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법인은 내 보스나 본사도 나랑 똑같이 생각해서 푸시한다는 어려움이 더해집니다. 내 몸에 새겨진 k-직장인의 DNA는 어떻게든 해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따라오지 않고, 위에서는 더 강하게 해내라고 다그치는 상황. 그래서 계속 더 힘든 일들이 생겼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