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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Apr 23. 2024

conflict(다툼)도 권장합니다.

싫은 소리 하기 꺼리던 내가 싸움닭이 되었던 이유

저는 예전 회사를 다니면서 13년 동안 업무적으로 언성을 높여 싸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회사일, 나 하나 안달 부린다고 대세는 바뀌지 않는다고 믿었고, 어차피 조직 바뀌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굳이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죠.


 그렇게 생각했던 건 회사 입사 후 4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씩 조직이 바꿨던 탓이 큽니다. 당시 연구소장님께서 비슷비슷한 업무를 하는 여러 개의 팀에서 사람을 주기적으로 로테이션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셨거든요. 6개월이 지나면 내 팀이 바뀌던 내 팀장이 바뀌던, 아니면 팀원이 바뀌던 뭔가가 바꿨고 업무 분장을 다시 했죠. 결국 담당하던 브랜드가 바뀌던, 아니면 개발하고 있던 제품이 바뀌던 뭔가는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뭐 어차피 일은 6개월 뒤에는 바뀔 건데 뭐 굳이 언성 높여서 관계가 껄끄러워질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죠. 그래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유관부서에서 잘 안 도와주면, 동정에 호소하고 부탁하는 방식으로 해결했었습니다.  서로 미루는 일은 싸우느니 그냥 제가 해버리자고 굴다가 “싫다는 말 하는 게 무섭냐”며 팀장한테 한 소리 들은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 회사에서는 제가 최고의 싸움닭이 되었네요.


발단은 이렇습니다. 이 글 초반에 썼던 것처럼 정치 싸움 한가운데로 들어간 입사 초기, 전임자가 속해 있던 계열사의 견제가 너무 심해서 일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계열사 지점장은 인수인계 대신 컨센서스가 필요하다는 둥, 저보고 제 밑에 있는 6개월 된 신입사원한테 인수인계를 받으라는 둥, 제 면접을 본인이 봐야 했다는 둥, 제대로 인수인계도 안 하면서 R&R을 운운하며 월권을 행사하고 있었죠. 참다못해 법인장님께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했을 때, 법인장님이 저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물론 사이좋게 일하는 게 제일 좋지만,
그렇게 해서 업무를 하기 힘들다면
‘conflict’도 권장합니다.


즉 좋은 말로 해서 안 되면 싸워서라도 해내라는 것이었죠. 그리고는 법인장님은 바로 계열사 지점장님을 불러 한소리를 했습니다. 지점장님은 아무 말도 못 하고는 알겠다고 하더니, 나오자마자 다른 소리를 하네요.


처음 들어왔을 때는 어떻게든 사이좋게 지내려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받아줬더니, 얕잡아 봤나 보다.  지금이 ‘conflict’이 필요한 타이밍이구나,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물러서지 않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거랑 앞으로 해줬으면 하는 업무협조 방향을 설명하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1시간을 언성을 높여 이야기하고 난 뒤로 효과가 있긴 했는지 지점장의 월권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비록 업무 협조는 여전히 잘 안 되었지만 말이죠.



그리고 한 달 뒤였나, 저는 법인장님으로부터 또다시 그 말을 듣게 됩니다.


“conflict도 권장합니다”


그다음 타자는 법무팀이었습니다. 법무팀과의 업무적으로 처음 접촉한 건 유럽본부와 함께 있는 광고 대행사와의 업무계약서 체결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계약은 본사에서 광고비를 지원해 주는 ‘멤버스 위크’ 행사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죠. 그런데 행사 시작 1주일 전, 이 행사에 대한 “term & conditions(약관?)” 내용이 빠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유럽본부에서 행사페이지를 만들면서 기본 템플릿 내용 중에 ‘자세한 사항은 약관 참조’라는 문구가 있는데, 막상 약관 내용을 따로 받은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행사시작까지 1주일도 안 남았던 터라 마음이 급했습니다. 부랴부랴 같은 행사를 먼저 진행했던 영국법인의 홈페이지에서 약관을 찾아 수정을 시작했습니다. 현지 상황에 맞게 문구를 고치고 법무팀의 확인을 받으면 번역을 해서 유럽본부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잡혀있던 법무팀과 미팅 건이 더 급하니, 먼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제, 배송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이 적혀 있는 A4 한 장 반짜리 약관이라 난이도 최하의 단순 업무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미팅에서 법무팀과 문제 될 만한 부분을 모두 논의해서 고쳤기에 별도의 수정 없이, 법무팀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어도 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급한 마음에 법무팀에 따라다니며 부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차피 5분 10분이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한국에서 흔히 하는 ‘급해서요, 한 번만요, 잠깐만 확인해 주면 안 될까요?’ 스킬을 쓴 거죠. 하지만 법무팀은 그날 하루종일 CFO 요청으로 본사에서 온 일을 해야 한다며 못 해준답니다. 제 거가 더 우선순위가 있다면 자기에게 이 일을 시킨 CFO에게 우선순위를 확인하랍니다.


그 길로 저는 법인에서 CFO역할을 하시는 주재원께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사정을 들으시거니 간단한 거니, 지금 하는 거 다 하는 데로 바로 해주라고 메일을 보내겠답니다. 그다음 날 겨우겨우 약관내용이 문제없다는 확인 메일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왔다 갔다 하는 메일이 묘하게 날이 서있었지만 그냥 감사하다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월요일. 약관 건은 끝났으니, 이제 ‘계약서’ 체결을 마무리지을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의 때 만난 법무팀에게 계약서 수정본 언제 보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얼굴로 본인 방으로 따라오라네요. 그러더니 저보고 제가 본인 등에 칼을 꽂았다며 막 화를 내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뭔 소린가 했더니, CFO가 보낸 메일이 문제였습니다.  본인의 업무 우선순위는 본인이 정하는 거지 네가 뭔데 왜 CFO한테 말해서 자신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만드냐는 겁니다. 자신은 CFO밑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CFO는 자신의 보스가 아닌데, 왜 CFO로부터 "지금 하는 거 끝나면 약관 봐주세요"라는 메일을 받게 만드냐고요. 


아니, 본인이 저에게 CFO에게 우선순위를 확인해 오래서 시키는 대로 한 건데 왜 난리인가 싶어 황당했습니다. 나는 네가 우선순위 확인해 달라고 해서 그대로 했던 거뿐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 계속 몰아붙이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바쁘니 2시간 뒤에 다시 오랍니다.


그 길로 나서서 여기저기에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자신의 업무영역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걸 침범받는 걸 매우 싫어한답니다. 그리고 어떤 업무 요청이 들어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야 할 업무들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서 일을 하는데, 우리나라처럼 중간에 얼마큼 되었냐거나 언제 줄 거냐고 채근하는 것은 그 사람 업무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느낀답니다. 저 사람이 기안내에 다 못 할 거 같으니까 체크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법무팀에서 먼저 저한테 우선순위를 확인해 보라고 한 거였던 거 아닙니까? 그 얘기를 했더니, 아마도 법무팀에서는 "네가 급하다고 하는데 본사에서 온 것만큼 급해? 아니잖아 그러니까 기다려라"는 의미로 그 얘기를 했던 거 같답니다.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해서 법무팀에게 “I am sorry”라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팅을 기다리는 데 너무 화가 나네요. 눈가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은 결국 눈밖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제가 앞선 글에서 다른 미팅 때 눈물이 흘렀다고 썼었는데, 시기를 헷갈렸네요. 그전에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정도였고, 눈물을 흘린 건 이때였더라고요. 앞의 글도 수정했습니다.) 미팅 시작 시간이 되어 눈물을 닦고 미팅에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임 쏘리가 영어에서는 꽤 파워풀한 문장이더라고요. 마치 교통사고에서 ’죄송합니다 ‘라고 먼저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 말하는 순간 그 사람 잘못으로 사고 난 것처럼 된다고. 메일에 쓴 아임쏘리도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메일을 본 법무팀은 이미 기분이 풀려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의미로 한 행동은 아닌데 네가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고 했다고 덧붙였더니 이미 자기는 괜찮다며 다 이해한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시키는 대로 해왔는데 왜 내가 미안하다고 하고 있을까 싶어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걸 본 법무팀장은 전임자 때문에 너무 힘든 거 다 이해한다면서 본인은 내 편이랍니다.  전 전혀 그렇게 느껴지 못 했는데, 자기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너에게 더 신경을 써주며 일을 하고 있답니다.


그래놓고는, 앞으로는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이번처럼 당장 해달라고 보내지 말고 최소한 10일 전에는 요청하랍니다. 만약 답이 너무 안 오면 “kindly remind”라고 써서 메일을 쓰랍니다. 제가 했던 것처럼 아무 때나 와서 언제 되냐 빨리 해달라고 하지 말라면서요.


결국 수정본 대신 충고만 잔뜩 받은 채 미팅이 끝났습니다. 수정본은 내일모레 중으로 주겠답니다. 하지만 삼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답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찾아갈 힘도 없어 법무팀이 원하는 대로 “kindly remind”를 써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알겠다고만 하고 진전습니다.


시간은 흘러 흘러, 멤버스 위크 행사가 코 앞인데, 계약서 수정본은 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당장 광고를 집행해야 하는데 광고대행사와 업무 계약조차 되지 않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법무팀장은 팔이 다쳐서 병가를 갔네요. 병가라도 일은 한다고 했는데, 그 일이 무슨 일이었던 건지 저희 수정본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팔 아파서 회사도 안 오시는 법무팀장께서 퇴사자의 환송파티는 가셨다네요


2주가 다 되도록 수정본은 안 오는데, 주말 저녁 몇 시간을 즐겁놀다 가셨다는 말을 전해 듣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kindly remind” 메일을 썼습니다. 이번에는 법인장님을 참조로 넣어서.


법인장님이 저를 부르더니 사정을 물어보시고는 바로 법무팀에 전화해서 좀 빠르게 부탁한다고 얘기를 하네요. 그러면서 저한테 또 그 얘기를 하셨죠.

conflict도 권장합니다


보스에게 한소리 들었기 때문인가요? 소식 없이 잠잠하던 법무팀에서 저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근데 첫마디가 “I am angry”랍니다. 자기가 한 소리 듣게 왜 그런 메일 보냈냐는 거겠죠. 그러면서 자기 지금 팔 다쳐서 전치 몇 주 나왔는데도 집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그렇게 급하면 자기한테 전화하지 왜 전화도 안 하면서 이렇게 메일을 보냈냡니다. 아니 본인이 나한테 kindly remind 메일 보내라고 시켜놓고, 왜 전화를 안 했냐니요? 저는 모든 문서를 넘겨줬고 달라는 모든 의견과 수정사항을 전달했습니다. 이제 모든 공은 법무팀으로 넘어와서 수정할 내용을 법에 맞게 적는 내용밖에 없었고요. 근데 내일모레까지 준다던 수정본을 차일피일 미루며 2주일째 안 줘놓고 왜 저한테 전화를 안 했다고 따지는 겁니까? 그리고 전화가 필요하면 본인이 하셔야지. 본인 할 일은 안 해놓고 저한테 화풀이한다 싶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Conflict을 권장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얘기는 한국에서 회사어로는 “싸워라”인 거잖아요.


그래서 저도 지지 않고 그랬죠. 나도 화난다고. 네가 나한테 kindly remind 메일 보내라고 해놓고 왜 이제 와서 이러냐. 지금 그 수정본 준다고 한 게 언제냐. 나도 급한데 네가 팔 다쳤다고 해서 일부러 별다른 말 안 하고 2주 넘게 기다려준 거다, 근데 왜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냐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재고를 주문하고 관리하는 담당자과 함께였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제품팀과 일주일마다 회의를 하면서 행사 품목과 수량을 확인했었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해당 파일을 업데이트해서 공유했고요. 근데 이제 와서 다른 채널에서 필요하니 가져다 쓰겠답니다. 뭐 전략적으로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합의점을 찾아야지.


근데 사실 그 담당자는 저한테 바로 와서 의사를 묻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희 몰래 그 재고를 다른 채널에 주려다가 SCM에서 이거 온라인 거니까 저랑 얘기를 하라고 해서 저한테 온 거였습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왔다 갔다 했던 그 달에 저희가 쓰기로 정해놓은 재고 수량인데 말이죠. 그러면서 격양된 목소리로 왜 자기네 제품인데 재고를 자기가 마음대로 못하고 저한테 확인을 받아야 하냐며 화를 내네요. 자기는 그 숫자 뭔지도 모르겠다며. 마치 저희가 재고를 훔쳐가기라도 한 것처럼 화를 내는 겁니다.


아니 이 파일을 회의 때 몇 번을 같이 열어서 봤고 몇 번을 공유했는데 무슨 숫자인지 모르겠다니요. 애초에 숫자조차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제품팀에서 정해서 준거고 저희는 파일에만 정리한 거였는데요. 미팅이며 파일 업데이트며 메일송부까지 이제까지 들인 시간이 생각나서 화를 내고 말았네요.


근데 참 나쁜 게 다툼도 권장한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들어가며 부추김을 받고, 한두 번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니까 점점 더 언성을 높이기가 쉬워지더라고요. 그 이후에 여러 번 각기 다른 사람에게 화를 냈습니다. 전 회사에서 이런 일은 13년 동안 두 번인가  있었나 싶은데 여기에서는 한 달에 1번 이상 그러고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이상은 눈물이 나오고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회사 생활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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