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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Apr 16. 2024

눈물과 분노의 시작

화가 넘치면 눈물이 되네

예전에 회사를 13년을 다니면서 회사에서 눈물을 흘렸던 적은 딱 한 번이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처음으로 혼자 공장에 파일럿 생산을 갔을 때였습니다. 가뜩이나 어리바리한데다가, 까칠하기로 유명한 작업자가 걸렸던 탓에 생산하는 내내 툴툴거렸습니다. 사실 지금은 뭐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공정 중에 뭔가 이상해졌나 봅니다. 저에게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봤습니다.

사실 그 제품은 제가 새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계속 생산되고 있던 기존 처방에서 극히 일부만 바뀐 제품이었습니다. 선배들도  그냥 옆에 앉아있다만 오라고 했던 제품이라, 아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어, 왜 이상하지?
 근데 나도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하지?


이러며 당황하기 시작했는데 연구원이 모르면 어떻게 하냐며 막 다그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지금 같았으면 해결할 경험과 수완이 있을 텐데 햇병아리 시절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죠. 원래 아무 문제 없이 나가던 건데 왜 갑자기 이러나 싶고, 나라고 모르고 싶은 게 아닌데 왜 나한테만 뭐라 하나 싶은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작업자는 당황해하고 근처에 계시던 반장님이 깜짝 놀라서 달려오셨습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연신 "괜찮혀~"라고 하시며, 상황을 정리해주셨죠.


좀 경험이 생긴 뒤 보니, 그때 생겼던 문제는 문제라고 할만한 수준도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한번 해보시죠" 하면 끝나는 단순한 일이었는데, 까칠한 작업자가 부린 텃세에 걸린 거죠.


공장에서 작업자들은 평소에는 혼자서 생산을 합니다. 하지만, 연구소에서 파일럿 테스트를 하러 나오면 시작부터 끝까지 감시 아닌 감시를 당하게 되는데 그게 못 마땅했던 거죠. 경험 많은 연구원이면 자기가 놓친 부분도 챙기고 문제 생겼을 때 해결도 하는데, 그때 저 같은 생짜초보들은 경험도 지식도 없어서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연구원이랍시고  배 놔라 감 놔라 하니 눈에 거슬릴 수밖에요. 그래서 신입사원 길들이기 느낌으로 텃세를 부린 거였습니다.




텃세는 한국이든 스웨덴이든 공통이었을까요? 메일로 저에게 계약서가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유럽본부와 연결된 광고대행사가 보낸 업무 계약서였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멤버스위크의 숨겨진 목적 중 하나는 유럽본부가 연결된 광고대행사에 일감을 몰아줘서 매출을 올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예산도 유럽본부가 본사 예산을 따왔으니, 산하법인들은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혹시 제 전임자가 소속된 회사 기억나시나요? 마치 한 몸 아닌 한 몸처럼 법인의 마케팅을 대행하고 있다던 계열사말입니다. 이번에 계약하려던 광고대행사도 그 회사와 동일한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유럽본부가 위치한 곳에 있는 현지법인이라 계약서도 따로 써야 하더라고요.


계약서를 받은 건 입사한 지 3주 차 정도였습니다. 예전 회사에 있을 때 계약서를 많이 써본 건 아니지만, 쓸 때는 항상 법무팀을 통해서 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이 없었습니다. 예전 회사에서는 필요사항만 간단히 알려주면 법무팀에서 가지고 있는 템플릿에 넣어서 계약서 초안을 만들어서 전달해 줬습니다. 그럼 저는 상대편회사에 전달하고 수정된 버전 받아서 다시 법무팀에 전달해 주는 전달자의 역할만 했죠. 혹시 이상한게 있으면 법무팀에 문의하긴 했지만, 제가 할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전달괴 최종 도장찍기 정도?



계약서를 받고 나서
일단 전임자를 찾아갔습니다.


저한테 그는 이 계약이 독점계약만 아니면 상관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독점 계약이면 앞으로 모든 광고집행을 독일을 통해서 해야 하니 꽤 불편하고 예민한 문제였죠. 그러면서 법무팀 검토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그와 같이 법무팀을 만났더니 저보고 이 계약서의 주인은 저랍니다. 이 계약서에 어디도 제 이름이 없는데 왜 제가 이 계약서의 주인일까요, 계약서의 주인은 법무팀이던지 회사 아닌가요? 아니랍니다. 제가 가져왔으니 계약서의 주인이랍니다. 그러니 저보고 계약서를 읽고 계약서 내용을 본인에게 설명해야 하랍니다. 최대 몇십 장짜리 영문 계약서 3종을 말입니다. 그리고 마케팅, 재무, 물류등 관련된 조항이 있으면 해당 부서에 가서 의견을 받아 오랍니다.


스웨덴 법도 모르고 이 회사 관행도 모르는데 내가 이 계약서의 주인인 게 말이 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급하니 일단 알겠다고 하고 재무와 마케팅팀에 계약서를 보낸 뒤 찾아갔습니다. 법인에서 잔뼈가 굵으신 재무팀 팀장님은 처음 보는 계약서인데도 금세 내용을 파악해 내용을 설명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긴 계약서는 유럽본부가 광고대행사랑 한 업무 계약서이고 우리가 받은 건 비록 워드파일이지만 이건 그쪽에 이미 사인을 한 계약서일 거 랍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인된 계약서를 근거로 하여 딸림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 상황이며,  그 양식이 같이 온 다른 두 계약서랍니다. 어차피 유럽본부에서 다 확인해서 만들어놓은 포맷을 보낸 거라서 형식적으로 검토하는 거지 실제로 우리가 수정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또한, 본인 부분인 지불 관련 조항도 문제없으시답니다. 마케팅에서는 답변을 주는데 비록  일주일이나 걸렸지만 크게 문제없어 보인다고 해서 해당 내용을 법무팀에 메일로 보낸 후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드디어 계약서 검토해서 넘기나 했더니 이게 무슨 일?


새로운 미팅에서 법무팀은 "계약서 주인은 저"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계약서를 한줄한줄 다 읽어보고 의심스러운 부분에 코멘트를 넣어서 다시 달랍니다.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뭔가 싶었지만 따지기보다는 빨리 그냥 해서 끝내버리고 말자는 마음이 커,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긴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모르는 용어는 구글링을 통해서 파악하며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코멘트를 달아 메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법무팀과 미팅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또 태클이 들어옵니다. 이번에는 제가 보낸 계약서 중 제일 긴 계약서, 즉 유럽본부가 광고대행사랑 체결하는 계약서가 사인된 원본이 아니라서 자기는 검토할 수가 없답니다.


최종본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그 계약서를 법무팀으로 보낸게 벌써 3주전이었습니다.  그 문서 처음 보낸 게 언제며 그 사이에 미팅을 몇번을 했는데 이제 와서 뭔 소리인가 싶어 욕이 나오려 하더라고요. 예정대로라면 멤버스 위크 행사는 2주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이 사람 저 사람 돌아다니느라 시간 다 쓰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계약서를 다시 받아오라니...


사실 그 계약서는 제가 담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온라인몰 매니저인데, 그 계약서는 디지털 마케팅의 광고 집행을 해주는 광고대행사와의 계약이었으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디지털 마케팅팀에서 담당해야 하지만 이 법인의 디지털 마케팅은 계열사에 100프로 외주를 주고 있기 때문에 법인 내 담당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디지털마케팅 담당자인 저의 전임자는 저에게 이 계약을 " 마케팅"에서 하게 하라더라고요. 모든 마케팅 활동과 비용은 마케팅에서 관리하고 있고 이 계약이 체결되면 온라인몰뿐 아니라 오프라인 매장의 디지털 광고 활동도 해당 광고대행사를 통해 진행할 테니, 마케팅에서 하는 게 맞다면서요. 하지만 마케팅 담당자는 본인이 받은 계약서가 아니라며 제가 하는 게 맞다고 미뤘습니다. 저는 멤버스위크를 하려면 계약서가 필요하니 급한 마음에 맡은 것뿐이고요.


그런데 고생은 고생대로 시키고 이제 와서 "사인된 버전"으로 다시 가지고 오니, 화가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화를 낼 수 없어서 참으니,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그 걸 본 법무팀장은 자기는 너 편이라며, 전임자 때문에 힘들지 않냐며 자기는 다 이해한다고 위로를 하네요. 아니라고, 너 때문에 그런다고 그냥 계약서나 검토해 주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일정이 급하다고 어필을 해봤지만, 자기가 안 된 다했다고 자기 탓을 하라며 웃어 보입니다.


속된 말로 이 뺑이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해봤지만 어차피 법무팀에 한 명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다네요. 답답하겠지만,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라더군요. 결국 계약서 검토는 원본 계약서를 받을 때까지 미뤄졌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스웨덴이 인간적인 신뢰가 생기기 전까지 협조적이지 않은 경향이 있답니다. 그래서 초반에는 업무보다 신뢰를 쌓는데 집중해야 한답니다. 저처럼 급하다고 어떻게든 일을 하려고 푸시하는 대신에 말입니다. 아마 입사하고 몇 달 만이라도 지난 뒤에 제가 계약서를 받았다면, 그 계약서를 들고 법무팀에 갔을 때 이 계약서가 뭔지 대충 살펴보고 필요한 걸 알려주지 않았을까요. 원본 계약서가 아니니 다시 요청하라는 말과 함께요.


아무튼 결국 그렁그렁했던 눈물은 법무팀과 다음 사건으로 눈 밖으로 흐르고 맙니다. 그 이후에도 몇번이나억울하고 화나는 순간에 참지 못 하고 흘러나왔고요. 제가 느끼기에는 새로운 사람 길들이기, "텃세"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에서요. 제대로 된 템플릿을 만들겠다고 새벽 네시까지 집에서 야근하다 출근했는데 유관부서에서 다양한 이유로 공격해 올 때. 이제껏 아무도 공유한 적 없는 자료를 왜 담당인데 분석을 해서 제안하지 않냐고 따질 때. 우리가 해달라는 건 안 해주면서, 기존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까지 모두 우리 팀한테 미룰 때 등등.


온전히 온라인몰만 담당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온갖 부서의 온갖 일들이 저에게 흘러오고 있었습니다. 있던 일은 떠넘기고, 사람이 늘어났으니 제대로 잘해야 한다며 없던 일도 만들어서 챌린지하던 탓이죠. 같이 해나가려는 사람보다 일을 주는 사람이 더 많으니 일은 자꾸 쌓여갔고 쌓여가는 일만큼이나 분노의 눈물도 흘릴 날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13년 동안 회사 다니면서 언성 높여 본 적이 한 손가락에 꼽는 평화주의자인 제가, 한 달에 한번 꼴로 언성을 높이며 폭발하는 싸움닭으로 바뀌게 되었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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