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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열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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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 Nov 16. 2019

전사(戰士)의 대(代)

  또다. 나는 네가 달려 나간 자리에 홀로 남겨진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텀블러에 담아 달라고 하자니까. 도중엔 안 되겠지만, 끝내곤 마실 수 있을 거다. 창밖엔 싸락눈이 날리고 있었다. 넌 추위도 많이 타는데. 나는 시계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텀블러가 진열된 선반으로 갔다. 떨어져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것. 그리고 한 손에 잡을 만한 크기로. 네 손 크기가 어땠더라, 나와 비슷했던가? 나는 손을 쫙 펴서 네 손을 가늠해보다가, 하나를 집어보았다. 잡기에 애매한 것 같았다. 나는 진열된 텀블러와 보온병들을 모두 잡아본 후에야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계산을 하며, 커피에 따뜻한 물을 좀 더 부어 보온병에 담아달라고 부탁했다. 네 커피는 우풍에 식어가고 있었다. 직원은 흔쾌히 그렇게 해주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남겨졌던 커피잔의 자리를 보온병이 대신했다. 나는 내 커피를 마시며 너를 기다렸다. 

  너는 언제나 타이밍 좋게 나타났다. 그러나 언제나 타이밍 나쁘게 사라진다. 그래서 너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좋지는 않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만, 나서서 변명해주지 않는다. 아니, 알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이유를 말해줄 수 없다. 

  탁자에 올려 둔 핸드폰이 반짝였다. 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곧바로 받았다.

  “데리러 와줘.”

  나는 너의 보온병이 단단히 닫혔는지 확인한 뒤, 가방에 넣었다. 내 커피는 한 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말한 곳으로 달려가니, 너는 벤치에 축 늘어져 있었다. 벤치를 찾아 앉아있을 정도라면, 오늘은 양호한 편이라 생각하며 너에게 다가갔다. 나는 네 옆에 앉아 늘어진 너를 껴안았다. 너는 조금 떨고 있었다. 일을 해결하고 나면, 너는 언제나 다쳤다. 보이지 않을 상처들이, 내게는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모든 것이 끝난 후 너를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너는 조금씩 진정되어갔다. 나는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 뚜껑을 열어 너에게 내밀었다. 너는 얌전히 받았다. 그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커피향이 순식간에 너에게서 날아올랐다.

  “따뜻하네.”

  너의 목이 조금 잠겼다. 네가 커피를 다 마실 동안, 나는 잠자코 네 가녀린 어깨를 안고 있었다. 나보다 조금 키가 크고, 더 얇은 뼈대를 가진 너. 왜 너여야만 했을까. 

  세상을 지키는 일 같은 걸, 해야 하는 것은.       


  네가 하는 일을 내가 알게 된 건, 너에겐 조력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특별한’ 일에서가 아니라, 너의 ‘평범한’ 일상의 유지를 도와줄 조력자가. 그날은 평범하게 맑은 날이었고, 너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과 대치하고 있었다. 비록 골목이었다지만, 한대낮에 괴이한 것과 싸우고 있던 너를,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 일이 생겼다며, 갑자기 달려간 너를 뒤쫓은 나만이 그것을 보았다. 그건 시커멓고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몸 안쪽은 찐득거리는 액체같이 보이면서도, 바깥쪽은 연기처럼 끊임없이 흩어졌다. 새빨간 눈을 했고, 입 안은 블랙홀처럼 홀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너는, 그것과 물리적으로 '싸웠'고, 네 마지막 일격에 그건 먼지처럼 덧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너는 한숨을 내쉬며 비틀거렸고, 나는 달려가 너를 받쳤다. 너는 무척이나 놀라며 나를 봤다. 나는 너의 상처를 확인해 보았으나 없었고, 다만 네가 상당히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너를 부축했고, 너는 조용히 나를 안았다. 그리고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저 등을 토닥이는 수밖엔 없었다. 

  “힘들었지.”

  너는 울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었다. 힘든 일을 겪은 건 너인데, 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이 역시 내가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 너는 나를 놓고, 무언가 망설이는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너를 붙잡고,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고 했다. 너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우선 집으로 가자고 너를 잡아끌었다. 너는 순순히 따라오며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나는 잠든 네 얼굴을 내려 보았다. 너는 무척 고단해보였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오늘 밤도 네가 무사히 잠든 채 지나가기를 빌었다. 오늘 밤도, 모두가 평안하기를. 누군가를 괴롭히지도, 괴로워하지도 않기를. 혹여 힘든 일이 있더라도, 스스로 이겨내기를. 그래서 네가 불현듯 잠에서 깨어 달려 나가는 일이 없기를.

  그 검고 괴이한 형체는, 쉽게 말하면 사람의 원한과도 같다고 했다. 그 사람 안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본래 추상적인 형태여야 하지만, 때때로 그가 가진 임계점을 넘는 순간, 그것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터져 나와 사람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 너의 설명이었다. 원한의 주인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 해치게 된다면서. 너는 그걸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든 건 그렇다 쳐도 마지막까지 나는 한 가지만은 납득하지 못 했다. 왜 너인가.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왜 너여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너는 그 부분만은 설명하지 못 했다. 

  "그냥…… 목소리가 들렸어."

  이렇게 얼버무리기만 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라고 했다. 그러자 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가 안 돼."

  그 시각화된 원한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볼 수 있었지만, 타격을 입힐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왜 볼 수 있는지는 너도 알지 못 한다고 했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절대 다가가진 마. 그냥 너는,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어."

  다만 네가 이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무얼 해보려 하기보단 뒤로 빠지기로 했다. 그것이 너를 돕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저 네가 싸우고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잠든 순간에 내가 곁을 지킬 수 있다면.     


   너는 움찔 했다. 나는 너를 붙잡았다. 나를 보는 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이미 한 번 이 수업 도중에 뛰쳐나간 적이 있다. 또다시 뛰쳐나가면, 너는 불이익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정원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는 전공수업. 너는 이 자리에서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너, 나가면. 나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도 따라갈 거야. 너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네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 손에 붙잡힌 너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삼십분이 지나자, 너는 하얗게 질려있었고, 그건 내가 아닌 누구라도 알 정도로 얼굴에 드러났다. 결국 교수님은 그런 너의 모습을 보더니, 그만 가서 쉬라는 말을 하고 말았다. 너는 그 말에 따라 일어났다. 나는 너를 데려다주고 오겠노라며 내 짐을 챙겼다. 너는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금방 돌아올 거라는 거짓말을 하고 너를 뒤따랐다.

  너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발걸음이었다. 어떤 일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그것도 저절로 알게 된다고 했다. 학교 뒤편쯤 오니 사람이 없었고, 너는 뛰기 시작했다. 너는 학교 뒷산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도 덩달아 뛰어 들어갔다. 늘어진 나뭇가지와 키 큰 풀들을 헤치고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그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닿은 자리엔 풀이나 이파리들이 시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익숙한 일인 듯, 주변에서 주먹만한 돌멩이를 찾아 그것에게 던졌다. 돌멩이는 그것의 머리 부분에 맞았고, 그것은 너를 돌아보았다. 나를 보았다가, 다시 너를 보았고, 돌을 던진 자세를 하고 있는 너로 마음을 굳힌 듯 했다. 

  "멀리 물러나!"

  나는 네 말대로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너에게로 다가오고, 너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나는 몇 걸음 더 뒤로 가서 섰다. 너와 그것은 꽤 오래 대치했다. 너는 결코 싸움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운동을 다닌 적도 없거니와, 누군가와 대립하거나 갈등하는 상황 자체를 견디지 못 하는 사람이었다.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양철 수세미 조각이 나와도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고, 조별과제에서 끝내 참여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모진 말을 하지 못 한다. 그건 네가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 상황을 회피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스트레스에 취약한 네 스스로의 보호기제에서 비롯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그건 네가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런 네가 스스로 싸움을 자처하고, 공격행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나는 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했다가 발생할 누군가의 피해를 알게 되는 것을 더 괴로워할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를 불렀다던 그 목소리는 신일까? 신이라면, 왜 그들 자신이 해결해주지 않고 우리에게, 정확히는 미약한 너에게 이런 일을 하도록 했는지 알 수 없다. 너는 얼마나 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것'에는 약점이 있다고 했다. 사람으로 치면 심장이 있는 위치가 바로 그것이라 했다. 눈을 제외하고 온 몸이 새까만데, 몸 중에 한 부분만 새빨갛게 빛이 난다고 했다. 그 부분이 바로 약점이며, 그 부분을 공격하고 치명상을 입히면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원래 싸움을 못 하는 너는, 항상 그것과 오래 대치하고, 상당히 많은 공격을 받으면서 일격을 노린다고 했다. 네가 항상 다쳐오는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여차하면 그것을 막아서거나, 너를 데리고 뛸 생각으로 서 있었다.

  그런 내 시야에 누군가가 잡혔다. 그것의 뒤쪽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심코 그쪽으로 다가서려 했다.

  "-!"

  네가 나를 부르며 막아섰고, 간발의 차이로 그것의 공격을 비껴갔다. 그것은 이번엔 나를 보았다. 나를 타겟으로 바꾼 건가 싶어 뛸 자세를 취하려는데, 쳐다만 볼 뿐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쳐다보아서, 나도 그것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무언가 말 하려는 듯 벌어진 입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러나 내게는 '으어으어'라는 소리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팔을 마구 휘둘렀는데, 공격보다는 위협용처럼 느껴졌다. 나는 너에게 왜 그런지를 물었다. 지난번 맞닥뜨렸던 것은 매우 흉포했다고 기억한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싶지 않은 거야."

  너는 그것을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가끔은 나도, 망설여져."

  나는 너에게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 뒤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다고 말했더니,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체야. 원래 몸. 이 사람을 쓰러뜨리면, 일어날 거야." 

  그 말을 알아들은 건지, 그것은 너와 나에게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대한 팔을 들어 우리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나는 순간 그것에게 달려들었다. 히어로 영화처럼, 그것을 막아서고 너에게 '지금이야!'를 외치려 했다. 그러나 나는 달려듦과 동시에 그것을 '통과'하여 그대로 나자빠졌다. 모양새는 좀 구겼지만, 효과는 있었다. 그것이 내가 저를 통과할 때 멈칫하며 행동을 멈추었고, 그 틈을 노려 네가 그것의 심장에 나뭇가지를 찔러 넣은 것이었다. 

  그것은 심장을 찔리는 순간 모든 것을 단념한 것 같았다. 내가 지난번에 봤던 것은 심장이 찔리자 포효하며 몸을 위협적으로 흔들어 댔었다. 그러나 이번 것은 마치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그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사라졌다. 공중에서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너는 재빨리 쓰러져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나도 가까이 가서 얼굴을 확인했다. 

  과 동기였다. 과의 모든 소문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는 동기를 과방에 데려다 놓았다.        

  그것이 터져 나온 뒤 그것의 '본체'는 정신을 잃는다고 했다. 그리고 네가 그것을 너무 늦게 찾지만 않는다면, 본체는 항상 그것의 주위에 있다고 설명했다. 본체는 그것을 해치우면 깨어나는데, 상태가 좋아 빨리 깨어날 것 같으면 근처에서 깨어날 때 까지 지켜보고, 상태가 나빠 보이면 구급차를 부른다고 했다. 다만 구급차를 너무 자주 부르면 의심받을 것 같아서, 몇 번씩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운 좋게 공중전화를 쓴다고 했다. 

  "그것도 사실은 그 사람인 거잖아. 그렇게 폭력을 쓰면 안 되는데. 분명 멍들거나 했을 거야. 원래 말로 도닥여서 설득을 해야 하는 건데."

  그것이 말이 통하는 존재냐고 반박하려 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힘들어서 못 해."

  그렇게 말하는 네가 울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너를 도닥였다. 그러다 문득 나는 그것이 터져 나온 후엔, 그 본체인 사람의 감정이나 문제는 해소되는 거냐고 물었다.

  "응, 그런 것 같아. 그 후엔 좀 잠잠해지거든. 적어도 다시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 걸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동기의 그것이 단념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생각났다. 동기의 원한과 감정은 해소되었을까? 애초에, 그것이 터져 나오면 사람들을 해친다더니, 동기의 그것은 왜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 의문을 너에게는 전하지 않았다. 너의 싸움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동기를 다시 과방에서 만났다. 

  과방에 있는 개인 사물함에 책을 넣고 있는데, 동기가 들어왔다. 동기는 나를 보고는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자신의 사물함을 열었다. 나와 동기는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쁜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 그 동기에 대해 질 나쁜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에, 동기는 누구든지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소문의 시작은 별 거 아니었다. 동기는 고학번의 남학생과 사귀다 몇 주 전에 헤어졌다. 헤어진 이후부터, 동기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진원지는 뻔했다. 소문은 남학생들을 통해 빠르게 퍼졌고, 몇몇 여학생들은 그걸 믿었다. 타이밍이 나빴다. 동기는 친한 사람이 몇 없었고, 그 중에서도 휴학을 하거나 시간표가 달라서 동기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해명할 자리도 없이 혼자가 되어간 것이라고 추측이 되었다.

  그래서 너는 그걸로 해결이 되었을까. 나는 무심코, 너에게 괜찮냐고 묻고 말았다. 쭈그려 책을 꺼내고 있던 동기는, 내 말에 나를 처음으로 쳐다보았다.

  "뭐가?"

  동기는 꽤 날카롭게 대답했다. 

  "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위로도 못 했고, 말주변도 없었다. 그건 네가 잘 하는 분야였다.

  동기는 사물함 문을 쾅, 소리나게 닫았다. 나는 동기에게서 무언가 해결됐다거나, 해소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다시 한 번 '그것'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동기가 나가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직접적으로 말해버렸다. 혼자 산으로 가지 마, 라고.

  순간 동기의 행동이 멈추었다. 책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동기는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 날, 나를 여기 데려다 놓은 게 너야?"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너의 이름을 댔다. 네가 구해준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왜?"

  나는 그런 일에 이유가 어디 있냐고 답했다.

  "다신 그러지 마. 그렇게 전해."

  하지만 감사는커녕, 동기의 태도는 더 냉랭해졌다.

  "나 슈퍼맨 영화 싫어하거든. 기대하게 만드니까. 너희가 지금 그러고 있잖아. 내가 익숙해지게 하지 마. 그렇게 전해."

  동기는 울분을 토하듯 덧붙여 말했다.

  "지금 도는 소문, 정말 모두 가짜라고 생각해?" 

  사실 양다리였다더라.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다더라. 예전에 왕따였다더라. 학교 남자들이랑 다 자고 다닌다더라. 등등.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이냐는 내가 알 길이 없었을 뿐더러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능력도 없는 나와, 그것이 튀어나오기 전의 너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너를 보통의 학생으로 유지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분명 동기의 짐은 무거울 테고, 나는 동기의 책임을 져 줄 자신이 없으며, 너는 동기만 챙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뛰어다녀도, 네가 해결하는 건 거의 없다. 네가 그것을 없애준 사람들 중에, 정말로 한을 해소시킨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또다시 너의 안녕을 위해 동기의 극복을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알수 없는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나는 너 같은 '전사'도 아니고, 동기와 친한 이도 아니지만, 혹시라도 지금이 기회인데 내가 그냥 흘려보내게 된다면. 그래서 그것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면. 지금 내 눈 앞의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라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그래서였을까. 뭐든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 버릴 필요는 없잖아. 살아남는 게 진실이야. 라고 막무가내로 내뱉어 버린 건.

  잘 알지도 못 하면서 괜한 참견 한다는 말을 방어하기 위해,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동기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네가 뻔한 말로 위안을 받아서 싫다고 말 한 적이 있었다. 어쩐지 동기의 표정이 좀 누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동기는 계속 내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자신을 구해준 것이 정말 너 뿐이었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너 뿐이었다고 대답했다. 동기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 날. 난 너를 본 것 같은데……."

  나는 숨을 삼켰다. 그 날, 나와 마주한 건 동기가 아니라, 그것이었다. 기억할 리 없었다.

  이 때, 너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재빨리 전화를 받자, 동기는 과방을 나섰다. 

  "데리러 와줘."

  너는 알았을까? 너에게 말하지 못 할 것들이 쌓여만 갔다.     


  너는 반복되고 지치는 일상을 계속해 나갔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발표 수업 중에, 네 생일에, 막 잠들려고 할 때. 너는 의무적으로 뛰쳐나갔다. 세상을 지키는 너의 안위를 위해, 나는 거짓말을 하고, 병원 진단서를 위조하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녔다. 너는, 그리고 널 따라 나 역시, 학교를 중심으로 반경 몇 십km이상은 나갈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의미를 찾으려 할수록 나는 지쳐갔고, 너 또한 그러했다.     


  "데리러 와줘."

  유독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꺼져가는 불빛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너를 감쌀 담요와 뜨거운 차를 챙기다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언제까지 너의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을까. 너는 한결같은데, 끝내 내가 나가떨어지게 된다면. 그렇게 내가 너를 혼자 남겨두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너는 쓰러져있는 웬 남자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얼른 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본체'인 것 같았다. 어딘지 낯이 익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와줄래? 혼자는 도저히 안 돼서."

  바로 옆에 주차되어있는 차 주인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운전 중이 아니라 차에서 내리면서 그것이 튀어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다행이냐고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너를 도와 그 남자를 부축했다. 여자 둘이 쓰러진 성인 남자를 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남자를 질질 끌어서 겨우 차 뒷좌석에 구겨 넣고 문을 닫았다. 너는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를 이끌어 근처 벤치로 데려갔다. 담요를 둘러주고 차를 건넸다. 너는 차를 받아든 뒤, 나에게 기대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혼자 있으면 언제고 도망치고 싶다가도, 이런 네 모습을 보면 다시 나를 탓하게 된다. 나는 습관적으로 너를 살피다가, 네 손등에서 푸른 멍을 발견했다. 나는 목도리를 고쳐 매주겠다는 핑계로 목도리를 풀었다. 볼 바깥쪽에, 목 뒤에, 원래라면 나지 않아야 할 멍들을 발견했다. 아마 네 소매를 들추면, 바짓단을 걷으면 더 많은 멍이 있으리라 예감했다. 

  너는 한계였다.

  상처가 추상적인 차원에서 물리적인 차원으로 넘어온 것이다. 나는 너에게 얼마나 오래 싸웠는지,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를 물었다.

  "오늘은 좀 포악하긴 하더라."

  너는 그렇게만 말했다. 나는 차 안에 안전하게 구겨져있을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 났다. 저 남자는 내가 아직 신입생일 때 들었던 동아리의 선배였다. 그때 저 남자는 막 제대한 복학생이었는데, 이미 악명이 자자했다. 신입생만 들어오면 추근대고, 스토커짓을 한다고. 오늘은 그렇게 뛰쳐나가지 않아도 될 뻔했다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는 못 들었다는 듯 나를 봤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나는 다른 걸 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느냐고. 너는 잠시 침묵했다.

  "…아마도 다음 사람이 이어받을 때 까지……."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다음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나도 처음부터 이 일을 하지는 않았잖아?"

  나는 네가 언제부터 뛰쳐나가기 시작했는지 떠올리려 했다. 그런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분명 아니었다. 우리는 영화도 보러 다녔고, 여행도 갔고, 너는 수업을 빠진 적이 없었다. 

  언제부턴가의 기억이 흐릿했다. 기억들은 물 위에 뿌려진 유화물감처럼, 섞이되 융화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너는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왜 이토록 절실하게 너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너에게 목도리를 좀 더 단단하게 둘러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 이후에도 동아리 선배는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어린 여자애들에게 추근대고, 술자리에선 그들을 욕한다고 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난 내심 괘씸했다. 그러다 한 번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들이 활발하게 지나다니는 학교 광장에서였다. 그날도 나는 아침부터 뛰쳐나간 널 데리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팔짱을 껴서 나한테 기대게 하고 있었다. 우선 밥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굉장히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구멍 났어!"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보니 그 동아리 선배가 우리를, 정확히는 너의 다리를 손가락질하며 깔깔댔다. 너무 요란하게 웃은 나머지 주위의 사람들이 다 너의 다리를 봤고, 너는 순간 당혹스러워했다. 동아리 선배의 일행이 그를 만류했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쳐댔다.

  "구멍 난걸 입고 오냐."

  나는 너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검정 기모레깅스를 입었는데, 복사뼈 위로 몇 센티쯤 재봉선이 터져 있었다. 나는 울컥해서 그에게 따지려 했는데, 네가 내 팔을 꽉 잡으며 말렸다.

  "난 괜찮아. 그러지 마."

  난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너를 더 자극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행 중 한 명이 죄송하다고 대신 전했고, 그래서 나도 일행에게 조심해달라고 말했다. 대신 동아리 선배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중에 저놈 차를 긁던지 바퀴바람이라도 빼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식당으로 들어와 따뜻한 걸 먹으며 너에게 넌지시 말했다. 네가 구해준 사람들에게라도, 네가 구해준 티를 내는 게 어떻겠냐고. 너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겐 더더욱 말해선 안 돼."

  나는 어째서냐고 따져 물었다.

  "엮여선 안 되거든. 내가 누구인지, '그 상태'였을 때 마주쳤던 나를 인지해서는 안 돼."

  정말 개 같은 경우라고,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들에게 '그 상태'는 없던 일이어야 하니까. 기억하게 해선 안 돼. 일이 꼬일 거야."

  나는 밝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물을 떠다주겠다며 일어났다. 너는 항상 무언가에 조심스럽고, 두렵다. 세상을 구하는 일, 사람을 지키는 일에는 정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상 이치에 순응하고 의문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너는 너무도 적합한 인재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네가 그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너의 다음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인즉, 널 대신할 사람만 있다면, 넌 언제든지 그 일에서 내쳐질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너는 절대 내가 하는 건 싫다고 했다. 너는 무척이나 나의 평안을 바랐다. 나도 그다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너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너 몰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할 거라고, 이 세계가 아작 나든 말든, 사람들에게서 다 그것이 터져 나오든 말든, 버티고 서 있으면, 그 목소리는 나도 너도 아닌 제3자에게 그 일을 돌리게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우리는 모른 척 세상은 참 평화롭고 평범하다고 말 하면 된다. 

  '그게, 그렇게가 안 돼.'

  하지만 네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바람에, 나의 실행되지 않을 계획은 변경되었다. 모른 척 하는 건 나뿐이고, 너는 정말 모르게 되는 것으로. 

  네 터진 레깅스는 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너는 굳이 그것을 가져다가 터진 부분을 서투르게 꿰매었다. 그러고는 세탁기에 넣어버렸다. 나는 그 동아리놈이 차 옆에서 우스꽝스럽게 고꾸라져있을 때, 사진이나 찍어둘 걸 후회했다. 내일이라도 그 놈 차를 긁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너는 피곤하다며 먼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나는 불을 끄고, TV 소리를 줄였다. 

  처음에 넌 괜찮았다. 피곤해도 다치지 않았고, 자부심 가득했다. 하지만 금세 넌 나 없이는 집으로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지쳐갔다. 그리고 이제 너는 옷이 찢어지고 멍이 든다. 언젠가 나 모르게 그것에게 당해 쓰러질까봐, 영영 일어나지 못 할까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잠든 네 옆에 조금 더 붙어 앉았다. 아마 너도 네 멍의 존재에 대해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다음번엔 혼자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채널을 돌렸다.

  늦은 밤이라 TV에선 거의 재방송을 했다. 나는 문득 한 채널에서 멈추었다. 히어로 영화를 내보내고 있었다. 영화 속 히어로는 한창 악당을 소탕하고 있었다. 다채로운 의상에 거대한 힘, 그리고 화려한 액션을 선보였다.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은 숨기더라도 히어로의 모습은 거리낌 없이 나타냈으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가끔씩 나오는 그의 고뇌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악당을 저지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었다. 언제쯤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을까, 언제쯤 시험을 맘 놓고 칠 수 있을까, 이딴 것들이 아니었다. 너무도 영웅적인 그의 모습과는 달리, 너는 초라하고 하찮았다.

  히어로의 정체를 아는 친구는, 혹은 연인은 그를 응원했다. 걱정도 했지만 자랑스러워했으며, 네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다. 실패해서, '목소리'가 네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길 기대하고 있다. 

  히어로가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그의 얼굴은 자신감에 가득 차있었고, 그의 주먹엔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에겐 세상을 구한다는 자부심과,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유, 나는 아직도 너에게 그 이유를 듣지 못 했다. 

  나는 TV를 껐다. 내일은 파스와 연고를 더 사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누웠다.      


  "……."

  너였다. 그런데 너는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처럼 '데리러 와줘'라고 말해야 했다. 나는 쎄한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 호출이 아니었으면, 널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학번 순서대로 전체 상담이 이뤄졌으므로, 미루거나 거절할 수 없었다. 미루느니 지금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루는 게 나을 뻔 했다. 통화는 계속되고 있었으나,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전화는 계속 연결해 놓은 채, 위치추적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이건 만일을 위한 방편이었다. 계속 방편으로 남았어야만 했다. 나는 네 위치를 확인하고,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로 달려갔다. 차로 가면 금방인 곳이었다. 나는 계속 연결된 전화에 너를 불러댔다. 내가 가기 전까진 정신을 붙들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택시를 잡았다.

  며칠 전, 나는 네가 '그것'을 만들어내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었다. 너는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고민해서 내릴 답인가 생각했지만, 말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아마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겠지."

  나는 너의 '다음'이 생기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렇겠지. ……그 사람이 떠맡고 말겠지."

  너에게 가면서 나는 네가 무사하기를,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기를 기도했다.

  근처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렸다. 나는 지도를 보며 우선 달렸다. 하필 사람이 많은 번화가의 인도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부딪혀가며 너를 찾았다. 너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쓰러져있었다. 누구도 너를 발견하지 못 했으나, 교묘하게 너를 피해갔다. 나는 곧장 너에게 달려갔다. 나는 무릎을 꿇고 네 상체를 일으켜 안았다. 너는 겨우 눈만 떴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으어으어'하는 소리밖에 내지 못 했다. 나는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상황이 반전되어있는 너와 나였다. 네가 쓰러진 나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흐릿했던 기억들이 선명해지며 몰려들어왔다.       


  너의 '이전'은, 나였다.        


  처음에 나는 '그것'들을 해치울 때마다, 며칠씩 '본체'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들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면 그제야 안심을 했다. 한번은 스토커로 오해받아 신고당한 적도 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유독 호전되지 않아서 나는 대놓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수업에서 같은 조를 짜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러다 진짜로 친해지고 말았다. 나는 마음이 풀려서 같이 놀러 다니고, 술을 먹었다. 그러다 술에 취한 네가 문득, 나를 알아보고 말았다. 너의 심장을 찔렀던 나를.

  너는 잊었어야 할 그 때를 기억하고 말았고, '그것'을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버리고 말았다. 지금 너의 심장을 찌르면, 네 자체가 위험하게 된다는 것을. 너는 왠지 분노에 차서 나를 공격하려 들었고, 나는 계속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며 피하기만 했다. 그러나 결국 따라잡혀 네가 휘두른 팔에 나가떨어졌다. 평소와 달리 묵직함 아픔이 느껴졌다. 도망은커녕 일어나는 것도 힘겨웠다. 너는 마구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달려드는 너에게 맞서 너를 힘껏 껴안았다. 다시금 커다란 충격이 전해져왔지만, 너를 놓지 않았다. 너는 다시 포효했다. 나를 떨어뜨리려 몸을 흔들었고, 위협적으로 양팔을 휘둘렀다. 그러다 천천히 잠잠해졌다. 너는 작아지기 시작했다. 피부색이 돌아오고, 눈동자가 돌아오고, 너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쓰러졌다. 너는 내 상체를 일으켜 껴안았다. 너는 울기 시작했다. 너를 달래려 했지만, 내 입에선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너는 울음을 멈추었다. 그래, 아마도 여기었을 것이다. 네가 '목소리'를 들은 시점이.      


  -자, 다시 선택의 시간이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너는 뭐라고 입을 움직였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의 입모양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내가 다시 이 일을 맡는다면, 이 아이는 다시 평안을 되찾게 됩니까?'

  -모든 걸 묻고, 평안하겠지.

  네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 떨림을, 모른 척 했다.

  '왜 이 아이여야 했나요.'

  -그 아이가 선택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왜 나여야 했나요.'

  -그대는 거절하지 못 할 테니까.

  네가 이유를 말 하지 못 했던 이유였다.

  "할게요."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너는 고개를 저으며 울었다. 하지만 나를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풀려갔다. 나는 너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너를 계속 토닥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너는 점차 꺼무룩 의식을 잃어갔다. 깨어나고 난 후에는, 아마 모든 걸 잊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새로 방을 구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방을 옮길 것이고, 위치추적 어플리케이션을 삭제할 것이다. 다음 학기에는 너와 다른 수업들을 듣고, 시간대가 맞지 않아 같이 밥을 먹지 못 할 것이다. 너는 나를 잊는 대신 평안을 되찾을 것이고, 다시는 옷에 구멍이 나서 비웃음 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부축해 카페로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를 시켜 네 앞에 두었다. 내 목도리를 풀어 너에게 단단히 감았다. 조금 뒤면 너는 깨어날 것이고,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과거와 연결되어 살아갈 것이다. 

  나는 조용히 카페를 나섰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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