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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 Oct 12. 2020

나의 코로나 8월


  8월 1일, 거진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휴대폰으로 시간만 확인하고, 다른 알림들은 일절 확인하지 않았다. 한가롭게 뒤척이며 완전히 정신이 깰 때까지 그냥 누워 있었다. 마음이 평안했다. 퇴사 첫날이었다.     


  일하면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1년이 넘는 동안 쉼 없이 일하면서 나는 특히 심리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시도 때도 없는 업무 연락과, 밤샘 컨펌, 고압적인 상사... 새벽에 혼자남은 사무실에서 쌍욕을 포효하며 뛰어다니다 문득, 생각했다. 산속으로 들어갈 거야. 퇴사하면 가장 먼저 휴대폰을 끄고 산속으로 들어가 속세와 단절되리라. 시국이 어려우니 이직이 힘들 거라고? 좆까라 그래.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산속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태풍이 시작되었던 거다. 바다도 보지 못했다. 부산에 사는 친구들을 매년 만나는 편인데, 퇴사 후 친구들과의 일정이 마침 딱 맞았다. 태풍이 지나가고 호텔을 예약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2단계가 되었다. 최저가로 구한 호텔은 환불이 안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고객센터에 전화가 비상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전화기만 붙든 결과 밤에 겨우 연결이 되어 예약 날짜를 미룰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가지 못했다. 그 사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된 것이다. 가려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KTX가 정말 ‘부산행’이 될 것 같아 관두었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부산에 사는 친구가 혼자 호캉스를 하는 걸로 마무리지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집순이지만, 속에는 엉망진창으로 뛰놀고 싶어 하는 망나니도 한 마리 자리잡고 있다. 산도 바다도, 심지어 한강도 갈 수 없으니, 나는 1시간 걸리는 마트를 걸어 갔다오자고 망나니와 합의를 봤다. 배낭까지 챙겨서 가지, 파프리카, 애호박 등 평소엔 잘 먹지 않았던 색색의 채소들을 넣어왔다. 맥주 때문에 가방이 무거웠으나, 미련하게 꿋꿋이 걸어왔다.

  집으로 돌아와, 사온 채소를 하나씩 씻어 썰기 시작했다. 말캉한 가지와 단단한 애호박, 속빈 파프리카... 묵묵히 채소들을 써는 시간이, 썩 괜찮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는 아직 못 봤지만.     


  그렇게 볶은 채소들은 며칠을 두고 먹었다. 운동이랍시고 팔굽혀펴기나 스쿼트를 몇 번 깔짝이긴 했지만, 대체로 생각 없이 누워 지냈다. 누워만 있어도 시간이 잘 갔다. 그렇게 8월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드디어 사람의 정신으로 회복한 나는, 회사에서 보류한 퇴사 처리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무음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릿터 독자 수기 공모에 응모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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