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한 사원들의 도시 카주라호
새벽에 출발한 카주라호(Khajuraho) 버스는 잔시(Jhansi)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카주라호로 가는 버스 안에서 홍콩 사람을 만났다. 비슷하게 생긴 아시아인이라 반가웠는지 옆에 앉아서 가도 되는지 물었다. 나는 흔쾌히 괜찮다고 했는데 조금 뒤 약간 후회를 했다. 그는 호기심 많은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한국의 정치부터 문화에 대한 주제까지(심지어 북한 인권 문제까지) 온갖 질문과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에 대한 모든 정보를 나열하고는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하며 계속 의견을 구했다. 지칠 줄 모르는 그와의 대화에 어느새 카주라호에 도착했다.
카주라호에 도착해서 숙소를 정하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봤다. 둘러보는데 몇몇 청년들이 인사를 하고 자꾸만 따라다녔다. 빨리 숙소를 정하고 싶어 불안해졌는데 어떤 곳은 텅 빈방에 도마뱀이 몇 마리가 기어 다니기도 했고 어떤 곳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감옥 창살이 달린 방도 있었다. 그중에서 빨래를 널 만한 옥상이 있고 침대가 편해 보이는 게스트 하우스로 정했다.
개인적으로 몇 달간 인도 여행을 하면서 가장 편했던 건 빨래였다. 호텔이 아니기 때문에 런드리를 맡길 수 없어도 아침에 나올 때 손빨래를 해서 널면 오후에 바짝 말라있기에 하루 만에 빨래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뜨거운 낮 더위에 땀을 잔뜩 흘리는 장기 일정임에도 몇 벌의 옷가지만으로 여행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델리의 호텔 런드리가 가장 편하긴 했지만)
해가 질 무렵 과일을 사러 나왔다가 한 인도인 쿠마르가 말을 걸어와 짜이를 함께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카주라호에 도착한 후에 많은 남자 청년들이 몰려들어 한국인인지 확인하고는 말을 걸어오며 서로 자신과 함께 다니자고 따라다녔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어떤 외국인 여자가 카주라호에 사는 한 남자와 눈이 맞아 오랜 기간 동안 지내며 연애를 했다. 작은 마을이기도 하고 혼자 다니는 외국인 여자 여행객도 드문 일이어서 연애에 대한 소문은 빨랐다. 그 여자는 남자에게 매우 잘 대해주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친절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는 남자에게 여행할 때 함께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를 선물하고 떠났다. 그 외국인 여자가 바로 한국 여자였던 것이다.
인도를 여행을 하는 동안 중국인 혹은 일본인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한국인이냐고 처음부터 물어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심지어 한국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카주라호에 도착해서는 대부분이 한국인이냐고 물었던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고,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자청하며 따라다닌 것도 이 전설 때문이었다.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나라이지만 한국에서 온 여자라면 부자이며 친절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여자와 만나고 싶다며 접근해 오는 젊은 남자들이 몇 명 있었던 걸 보면 카주라호에서는 꽤나 알려진 전설인가 보다 했다. 심지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말을 걸어오며 쫓아오는 젊은 사람들이 꽤 많아 귀찮을 정도. 이런 커다란 인도의 어느 마을에 한국인 여자에 대한 좋은 인식이 있다고 하니 해가져 숙소로 들어오는 밤길에도 이유 있는 친절함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그다지 무섭지 않고 내내 웃음이 났다.
책을 좀 읽다가 자려는데 옆방에 머무르는 손님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 노래에 침대에서 내려와 말려 볼까 하다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뒤로하고 결국 새벽녘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이 들어 늦게 일어나 하루에 다 돌아보는 건 무리일까 싶어 부랴부랴 씻고 과일을 입에 물고 나왔는데 부지런한 한국인이라 그래도 이른 아침이었는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커피가 한 잔 필요할 거 같아 길에서 파는 커피를 마신 후 서쪽 사원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템플 입장료는 타지마할과 마찬가지로 외국인이 몇 배 더 비쌌다. (중요한 문화재들의 입장료는 현지인 보다 외국인이 몇 배 더 비싸다.)
카주라호는 힌두교와 젠교 사원들로 구성되어 있어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찬드라 왕조(Chandela) 때 지어진 사원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서 사원들을 여유 있게 모두 보려면 적어도 2일 정도는 머물러야 한다. 사원들 사이 동선이 길고 릭샤로 다니기에는 길이 좁거나 애매한 거리여서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에 침략당하기 전 찬드라 왕조의 수도였던 이 카주라호, 지금은 작은 마을이 되었지만 사원 대부분이 885~1000년경 지어진 것으로 한 세기 동안 엄청난 규모의 사원들이 만들어진 시대였다.
기록에 의하면 12세기에는 85개의 사원이 있었지만 이 중에서 25개 사원만이 살아남았다. 이곳 역시 198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여러 사원들이 있는 만큼 인도 정부의 허가증이 있는 가이드를 고용할 수도 있고 자청해서 가이드를 하겠다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이 카주라호의 힌두 사원들은 남쪽에 있는 차투르부즈(Chaturbhuja)를 제외한 모든 사원이 일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남성적 신과 여성적 신의 통합과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많다. 대부분 복잡한 조각상들이 많은데 이는 *다르마, 카마, 아르타, 막샤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다수이며 왕성한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는 조각품들이 10% 미만을 차지하고 있다.
* 다르마(Dharma): 질서와 관습, 미덕, 의로움, 종교적 및 도덕적 의무를 뜻하며 여기에는 의무, 권리, 미덕 등 올바른 삶의 방식이 포함되며 이 다르마는 시간을 초월하는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 카마(Kama): 쾌락, 즐거움, 욕망의 개념이며 예술과 춤, 음악과 그림 조각 등과 자연과 관련하여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지칭한다. 현대 문학에서는 성적 욕망과 감정적 갈망을 의미하지만 고대의 개념은 사랑의 즐거움을 광범위하게 지칭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원의 에로틱한 조각품들이 많은 거 같다.)
* 아르타(Artsa): 인간 삶의 네 가지 목표 또는 목적 중 하나를 말하며 직업, 기술, 건강, 부와 번영 등 삶의 수단 등을, 개인의 맥락에서는 생계를 위한 활동, 재정적 안정, 경제적 번영이 포함된다.
* 막샤(Moksha): 해방, 열반, 종말론적 의미에서 죽음과 환생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자아실현, 자아의식을 말한다.
서쪽 사원들
락쉬미 사원(Lakshmi Temple)과 바라하 사원(Varaha Temple)을 시작으로 사원의 조각들을 보는데 힌두교, 젠교에 나오는 신들과 그 종교적 의미들을 알면 더 이해하기 쉽다.
락쉬미는 사라스와티(Saraswati)와 파르바티(Parbati)와 함께 세 여신에 속한다. 락쉬미는 부, 비옥함, 물질적 성취, 생식력 등을 상징하는 여신이다. 바라하 템플은 악을 제거하고 다르마의 회복을 유지하는 비쉬누(Vishnu) 신이 멧돼지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바친 사원이다. 멧돼지 형상을 한 대형 조각상에 수많은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락시마나 사원(Lakshmana Temple)도 비쉬누에게 바쳐졌으며 서쪽 사원 중 가장 오래되고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5개로 나뉜 건물 구조와 4개 부속 신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전투와 사냥, 행렬과 성적인 묘사 조각들이 있다.
칸다리야 마하데브 (Kandariya Mahadev) 사원은 규모가 가장 크며 예술적, 건축학 적으로 매우 완벽하다고 한다. 찬달라 예술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원의 안과 밖에는 조각상이 872개가 있고 대부분 1m의 높이로 조각되어 있다. 남신과 여신, 음악가들 뿐 아니라 유명한 에로틱한 작품들도 있다.
치트라굽타 사원(Chitragupta Temple)은 카주라호에서 유일하게 태양신 수리아(Surya)에게 바쳐진 사원이다. 행렬과 무희, 코끼리 싸움과 사냥 장면을 볼 수 있으며 비쉬누 신상도 있다.
비시바나타와 사원(Visvanatha Temple)과 난디 사원(Nandi Temple)의 난디는 거대한 황소 상을 말하며 공터 맞은편 끝에서 비시바나타 사원과 마주 보고 있다. 조각상들은 카주라호 사원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여성상들이 특히 두드러진다.
점심을 먹기 위해 숙소 쪽으로 가던 중 슈퍼마리오라는 가게에 들어갔는데 매우 친절하게 카쉬미르 차(Tea)와 쿠키를 그냥 먹으라며 내주었고 생각 없이 앉아 함께 먹고 마시며 이야길 했다. 결국 팔찌 하나를 강매로 구입하고 나왔다. 역시 공짜는 없다.
동쪽 사원들
동쪽 템플을 돌아보려는데 길이 헷갈렸다. 브라흐마 하누만 사원(Brahma Hanuman Temple)이 여기인가 저기인가 지도를 보며 찾고 있을 때 매든(Maden)이라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길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템플을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길을 알려주겠다며 가이드를 자청했다.
바마나 사원(Vamana Temple)은 비쉬누가 난쟁이로 화한 형상인 바마나에게 바쳐진 사원이며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사원이다. 묘한 자세를 취한 천상의 여인들 조각이 많은 곳이다.
자와리 사원(Javari)은 작지만 카주라호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사원이며 외부에는 카주라호의 여인상들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간타이 사원(Ghantai Temple)은 젠교 사원이며 종과 사슬 장식이 된 기둥이나 입구의 가루다(Garuda) 위에 앉은 젠교 여신상이 볼만하다.
아디나트 사원(Adinath Temple)은 마치 힌두교 사원처럼 보이지만 성소 안에 검은 아디나트 상이 있는 것을 보고 젠교 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르시바나트 사원(Parsvanath Temple)은 젠교 사원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원이다. 뛰어난 건축 기술과 정확성, 아름다운 조각상들로 유명하다.
남쪽 사원
둘라데오 사원(Duladeo Temple)은 젠교 사원들에서 남쪽으로 1km 비포장 도로를 걸어가면 나오는데, 카주라호의 초기 사원들보다 진부하다는 평이 있지만 구석구석 재미있는 조각들이 많은 건축물이다.
매든은 남쪽 템플까지 모두 가이드를 해주고는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고마워 매든, 혹시 가이드 답례로 한국 문화가 담긴 선물을 줄까?”
매든은 한참 생각하더니
“선물도 좋지만 돈을 준다면 우리 아빠가 더 좋아할 거야.”
“얼마를 주면 좋겠니?”
“글쎄, 당신이 원하는 만큼.”
“이 정도면 될까?”
나는 50루피를 꺼내 내밀며 말했다.
“아주 좋아.”
“그래, 가이드 고마웠어.”
어느새 사람들이 몰렸고 이야기하고 있는 나와 매든을 바라보았다.
“어, 우리 할아버지야. 함께 사진 찍어줄 수 있어?”
“그럼, 찍어줄게.”
나는 나와 함께 찍자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매든과 매든의 할아버지 둘이서 찍고 싶었던 것. 매든의 할아버지는 자전거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로 매든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웃으며 헤어졌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보물찾기 하듯 사원을 찾아다니다 보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 어떤 조각이 유명한지, 이 조각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떤 신을 상징화 한 것인지, 또 에로틱한 조각들은 ‘와우! 이런 조각을 버젓이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하는 마음에 호기심으로 돌아다녔는데 이 엄청난 사원들을 관람하는 중에도 따라다니는 청년들에게 시달려 하루가 조금 피곤했다. 매든이 길을 안내해줄 때도 청년들이 저리 가라며 뭐라고 하기도 했다. 매든의 길 안내를 받겠다고 했을 때에 청년들은 자신이 더 잘 안내할 수 있다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동선이 길고 가야 할 사원이 많았기에 2만 보는 족히 걸었는데 약간 친절하긴 했어도 말을 걸며 몰려다니니 더 피로해지는 느낌이다.
매든과 헤어진 뒤 숙소에 들어가 한 바가지 흘린 땀을 씻어내고 다시 나와 저녁을 먹은 후 댄스 공연을 보러 갔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꼭 둘러보는 곳 중의 하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찾아가 보는 것, 두 번째는 그 나라의 전통 춤을 관람하는 것이다. 코치나 라자스탄 주의 전통 춤을 볼 수 있었지만 이 마디아 프라데시 주(Madhya Pradesh)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또 다른 공연일 거 같아서 궁금했다. Kandariya Art & Culture에서 진행되는 춤 공연은 크리쉬나(Krishna) 신을 찬양하는 춤, 두르가 여신을 숭배하는 춤, 풍요나 다산에 감사를 올리는 춤 등 원주민들의 토속 신앙과 삶을 바탕으로 한 춤 공연이었다. 각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전통 의상과 춤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기회가 된다면 인도의 전통 춤으로 유명한 까탁 댄스를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춤에 담긴 의미를 안다면 이들이 표현하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카주라호에는 다양한 사원들과 더불어 유명한 것이 매년 2-3월 사이에 열리는 카주라호 댄스 페스티벌이다. 인도의 전통 댄서들이 참가하며 서쪽 사원 군에서 공연을 하는데 조명을 켠 사원을 배경으로 야외 공연을 한다.
인도는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는 축제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런 다양한 문화 축제에 꼭 한번 참여해보고 싶다.
#인도여행 #카주라호 #힌두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