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고 편안한 남부 인도, 첸나이
북부에서 남부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인도 북부인 바라나시(Varanasi)에서 남부 첸나이(Chennai)까지 기차를 타고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체감상 무궁화호 정도의 속도로 여러 역들을 들르고 또 들러오다 보니 기차에서 두 밤을 보냈다. 인도에서 기차를 몇 번 타보긴 했지만 침대칸은 처음이라 식사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물과 바나나 한 손, 간식을 사고 커피나 짜이를 마실 수 있게 동전을 좀 준비했다. 침대칸 2등석이었는데 아래, 윗부분으로 나눠져 있었다. 하필 내 좌석은 윗 칸이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 앉아 있으려면 허리를 숙이고 있거나 계속 누워있어야 해서 불편했는데 다행히도 아래 앉은 아저씨가 매우 친절했다. 낮에는 불편하니 침대를 접고 아래로 내려와 편히 앉아 있으라고 하며 쿠키도 나눠준다. 나도 바나나를 건네고 대화를 하면서 짜이도 함께 마셨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니 마주 보고 앉은 아래칸 여인과 부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린아이까지 세 가족이었는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라고 한다. 영어와 타밀어를 섞어 가며 이야기를 하기에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가족 혹은 친척집을 다녀오는 듯했다. 혼자 여행 중인 외국 여자를 신기하게 생각하며 여러 질문을 한다. 특히나 왜 혼자 여행을 하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배가 고플 때쯤 도시락을 싸 왔는지 은색으로 된 동그란 반찬 통을 몇 개 꺼내고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가 밥을 먹는다. 비리야니와 커리 종류가 들어있다.
옆 라인에는 남자친구가 사들고 온 도시락을 보며 활짝 웃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 아가씨와 아래칸 여인은 어느새 친구가 되어 한참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2박 3일간 그 젊은 가족과 짧은 대화를 하거나 짜이를 함께 마시고 간식도 나눠먹거나, 혼자 조용히 책을 읽으며 첸나이로 향했다.
“코피 코피 코피, 짜이 짜이 짜이.”
익숙한 커피와 짜이를 파는 상인도 역마다 보인다.
아이가 지루해질 무렵 인형 놀이를 함께 해주는 아빠, 울고 있는 아이를 가슴에 꼭 품고 있는 아기 엄마, 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 작은 휴대용 라디오로 음악을 듣는 가족들,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외국인인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사람들, 기차여행을 하며 만나는 광경이 우리와 별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익숙한 남부 인도, 첸나이
인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라는 첸나이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도시다. 인도 남부에서 몇 달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어를 하다가 현대 자동차 공장을 지나쳤는데 현대차가 100% 투자하여 설립한 공장이고 길을 다니다 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현대차가 훨씬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인도 현지인들이 일본 기업이라고 아는 사람들도 있어서 ‘한국’ 기업이라고 몇 번 알려주기도 했지만 다른 지역과 상대적으로 한국을 많이 알고 있었다. 흐린 날씨 속에서 가이드와 함께 몇 군데를 돌아보며 남부 인도를 느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첸나이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마음은 여유롭고 편했다.
보통 중부에서 북부 지역은 힌디어를 사용하지만 남부 지방, 특히 이 타밀나두 주 사람들은 타밀어를 사용하고 힌디어보다는 차라리 영어를 더 선호한다. 신기한 것은 타밀어와 한국어에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 그들도 엄마와 아빠를 엄마, 아빠라고 부른다. 1000개 이상의 단어가 같다고도 한다. (그래서 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었던가?) 타밀어를 좀 배워볼 걸 그랬다.
‘성 도마 대성당(San Thome Cathedral)과 성 도마 마운트(Parangimalai)
첸나이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성 도마 대성당은 포르투갈 인들이 현재의 첸나이에 선교사를 파견해 방치되어 있던 성 도마의 무덤을 찾았고, 1523년 도마의 무덤 위에 건축한 것으로 1896년에 영국인에 의해 신고딕 양식으로 재 건축 되었으며 지하에는 도마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의심 많은 제자, 도마’로 불리던 그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을 믿지 못했기에 자신이 직접 못 자국난 손목과 창 구멍 난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며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이후 예수가 도마 앞에 나타나 상처 자국을 보여주며 직접 확인하게 했고 그제야 부활을 믿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그림으로 유명하다.
예수의 부활 후 도마는 지역의 전통을 따라 남아시아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인도의 왕이 궁전을 짓기 위해 예루살렘에 신하들을 보냈을 때 목수였던 도마가 인도에 가게 되었다. 왕이 궁전을 짓기 위해 주는 돈을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런 도마 때문에 화가 난 왕은 그를 처형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의 동생이 거의 죽어가다가 살아났는데 그의 꿈속에서 천국의 화려한 왕궁을 보았는데 천사들이 말하기를 ‘이곳은 기독교인들이 당신의 형을 위해 지은 왕궁’이라고 알려주며 형에게 전하라는 이야기를 왕에게 그대로 알렸다. 이후 그 왕은 도마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의 선교를 허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성 도마 성당은 교황 바오로 2세가 방문하였으며 2004년 인도 천주교 협회에서 국가 성지로 선언하였고 이후 성 도마 성당 바실리카의 국가 성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성 도마의 언덕(St.Tomas Mount)
성 도마의 순교지라고 전해지는 이곳은 도마가 이 언덕의 돌에 새겨 개인 기도를 드리던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드리던 중 창에 찔려 뒤통수에 맞았다고 하며 이 십자가에는 순교자의 피가 묻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십자가는 미사 중에 피와 땀을 흘렸다고 전해지며 십자가 표면에 지금까지도 습기가 차오른다고 한다. 이 성스러운 돌 십자가에 닿는 것만으로도 많은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십자가의 주변에 새겨진 비문은 ‘메시아는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구원을 가져왔다’라고 쓰여있다.
성당에는 도마의 손가락과 뼈 조각이 성체함에 담겨 안치되어 있고 이로 인해 기적이 일어나는 일이 있었다고도 한다. 성당은 지금도 운영이 되고 있으며 영어, 힌디어, 타밀어 미사가 따로 진행된다. 성당 양쪽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열 두 사도의 그림을 볼 수 있고 조각품이나 그림도 볼 수 있다.
라지브 간디 기념관 ( Rajiv Gandhi Minaivakam)
인도의 6대 총리였던 라지브 간디를 기리는 기념관은 1991년 암살당한 장소인 스리페럼푸두르(Sriperumpudur)에 있다. 라지브 간디는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shini Gandhi)의 아들이며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의 손자이다.
1984년 10월 인디라 간디가 암살되고, 그 해 12월 라지브 간디는 40세의 나이에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인도 전역의 고등 교육을 확장하고 교육의 질을 상승시키려는 노력을 하였고 과학 기술 개발에 정부 자금을 투자하거나 기술산업의 관세를 줄여주는 등의 정책을 펴기도 했다. 1991년 테러로 인해 사망했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펀잡 협정(시크교 공동체에 대한 차별이 없을 것)과 인도-스리랑카 평화 협정, 아쌈 협정(불법 이주자 문제에 대해 체결한 양해 각서) 등을 그의 업적이라 생각하고, 명확한 비전과 높은 생활 수준으로 이끌어내기 위했던 리더로 평가하기도 한다.
*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shini Gandhi)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유일한 딸이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에 진학해 정치학, 역사학, 경제학 등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인도로 귀국한 후 아버지가 초대 총리로 선출되자 개인 비서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인맥을 넓혔고, 아버지가 서거하자 상원 의원을 거쳐 인도 총리로 추대되었다.
*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다. 부유한 브라만 가문에서 출생했으며 영국에서 유학해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은 뒤 귀국했다. 마하트마 간디와 동시대 인물이며 간디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비폭력운동에 협력하는 실질적 리더 역할을 했지만 적극적인 파업과 투쟁적인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후 영국에서 독립해 세워진 인도 자치령의 유일한 총리이자 인도 공화국의 초대 총리였다.
그가 죽은 자리에는 정사각형 대리석 받침대와 초상화가 상감되어 있고 7개의 화강암 기둥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7개의 기둥은 힌두교의 7가지 개념인 다르마(Dharma - 질서와 관습) 사티아(Satya - 진실, 본질), 나야(Nyaya - 정의, 규칙), 비그얀(Vigyan - 지식), 티아가(Tyaga - 희생), 샨티(내면의 평화), 삼리디(번영)를 의미하며, 가장 윗부분에는 7개의 강(갠지스, 야무나, 고다바리, 브라마푸트라, 나르마다, 신두, 카베리 강)을 상징하는 조각품이 올라가 있다. 각 기둥의 아래에는 라지브 간디의 인용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모든 종교에 흐르는 문화의 풍부한 영성의 원천에 깊이 있고 변함이 없는 감사를 느낀다. 이것은 우리의 도덕적 가치, 이상과 기준이며 목표와 목적의 원천이 됩니다. - 라지브 간디 1989, 05, 03
인도를 지탱하고 있는 7가지 정신을 보면서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공동체 정신의 이점, 낭만을 잃어가고 정의가 없는 무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우리에게는 어떤 정신이 남아 있는지, 국민의 나라였던 지금은 무엇으로 지탱하고 있는 나라가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마하발리푸람(Mahabalipuram)
첸나이 중심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이어진 해안도로 마하발리푸람은 해변의 사원으로 유명하다. 마하발라푸람은 동물의 제사를 지낸 곳이며 싸움을 잘했던 레슬러들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 마말란 Mamallan : 위대한 레슬링 선수, 위대한 전사)
타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영웅적 행동들이 많이 볼 수 있다. 주인공은 항상 힘이 센 레슬러 같은 스타일의 액션을 많이 취하는데 아마도 싸움을 잘하는 레슬러 스타일을 위대하게 바라보기 때문인 거 같다.
판차 라타스
판차 라타스 (Pancha Rathas 또는 Five Rathas)는 마하발리푸람에 있는 기념 단지이며 이곳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일부이다.
팔라바 왕조(Pallava Kingdom) 시대에 수도 칸치뿌람(Kanchipuram)의 항구 역할을 했던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기에 여러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웨스트 벵갈(북인도) 양식, 드라비디아(남인도) 양식, 스투파(서인도) 양식 등 고대 전차(Ratha)의 원형을 바탕으로 구조물을 설계했지만 중간에 왕조가 멸망하면서 미완성된 작품이라 정교하지 못하고 신전으로 사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관광지로는 각광받고 있으며 1927년 영국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한다.
두르바신, 시바신, 비쉬누신, 수리아신, 인두라신을 위한 신전이었다고 추측한다.
아르주나의 고행(Arjuna’s Penance)
이 아르주나의 고행은 마하발라푸람의 조각품들 중에 가장 뛰어난 부조 조각으로 유명하다. 두 개의 화강암 바위에 만들어졌으며 조각된 인물 중 다수는 실물 크기로 조각되었고, 신과 사람, 반인 반신, 동물 등 100개가 넘는 형상이 조각되어있다.
카밀라리쉬라는 사두는 6만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목욕을 하고 있는 동안에 시바신이 왔는데 그 제자들은 시바신(Shiva)을 몰랐기 때문에 욕을 했다. 그러자 시바신은 화가 나서 6만 명을 모두 죽였다. 마을이 혼란해져서 사두에게 어떻게 하면 마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를 물어봤고 ‘갠지스에 손을 담그면 된다’라고 했다. 갠지스는 시바 머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 손에 닿을 수 없었고 그런 그들은 시바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지만 카밀라리쉬는 절대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마을에 아르주나라는 인물이 기도하며 하늘을 향해 고행했다. 드디어 시바가 나타나 갠지스를 머리에서 떼어내 주자 땅으로 물이 흐르고 사람들은 갠지스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후 아르주나를 ‘바이라따(영웅)’이라고 불렀다.
이 아르주나의 고행 조각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아르주나의 고행뿐 아니라 고행에 감동한 시바 신의 모습, 거짓 고행을 하는 고양이의 모습, 요가를 하는 원숭이, 실제와 동일한 코끼리 조각, 두 마리의 사슴과 하늘로 승천하는 코브라도 볼 수 있다.
크리쉬나 만다팜(Krishna Mandapam)
가장 눈에 띄는 조각은 크리쉬나가 인드라신이 내린 엄청난 홍수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인드라신은 자신을 기리는 축제를 중단한 사람들에게 화가 나 폭풍을 동반한 극심한 폭우를 내리자 사람들의 생명이 위협당했다. 그러자 크리쉬나는 고바르다나 언덕을 들어 올려 막았고 마을 사람들을 그 아래로 모였다. 인드라신의 교만을 꺾기 위한 크리쉬나의 생각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연상되는 그림과 이야기였다.
이 크리쉬나 동굴의 조각은 힌두 서사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플루트를 연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는 것도 있다. 크리쉬나는 플루트를 매우 잘 불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젖 먹던 아이가 그 소리에 젖을 물지 않아 어머니가 그만 멈춰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14세기 경에는 그 동굴에 조각만 있었는데 비를 맞거나 상할까 봐 그 이후 지붕까지 덮었다고 한다.
벨로르 (Vellore)
첸나이에서 조금 왼쪽으로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벨로르.
도착했을 때 솔솔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바람처럼 성 주변은 시원했다. 벨로르는 Vayil + oor의 합성어인데 Vayil은 뜨거운 태양, oor는 도시를 뜻한다. 합치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도시라는 뜻이다. 무척 더운 낯이지만 시원한 바람도 불어온다.
벨로르 성(Vellore Fort)은 웅장한 성벽, 넓은 해자, 견고한 석조물로 유명하다.
사진에서 보았던 벨로르성은 물가가 아름다웠는데 도착해서 보니 강이 말라 있었다. 들어보니 우기를 제외하고는 강바닥이 항상 말라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벨로르의 7대 불가사의가 전해지기도 한다.
1. 나무가 없는 산 - 대부분의 산(이라고 하기엔 언덕처럼 보인다)은 메마른 바위 산이다.
2. 물이 없는 강 - 몬순을 제외하고는 말라있는 강바닥을 볼 수 있다.
3. 왕이 없는 요새 - 벨로르 성이 있지만 이곳에서 왕이 살았던 적이 없다
4. 신이 없는 사원 - 1981년 사원이 복원될 때까지 시바의 링감(신을 상징하는 제사의 대상)이 없었다.
5. 힘(권력)이 없는 경찰 - 이 작은 마을에는 경찰 훈련소가 있기에 캠퍼스 경비원만 있다.
6. 아름다움이 없는 여인들 - 벨로르 마을엔 아름다운 여자가 없다고 한다. (왜 불가사의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7. 왕의 통치가 한 번도 없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성안에서 유적을 돌아보며 제대로 보존하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것을 보면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문화유산이 많은데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곳들이 꽤 있고, 사람들이 성벽 옆에서 소변을 보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등의 행동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일은 문화재를 가꾸거나 관리하는 곳이 드물어서 인 거 같다. 타지마할을 제외하고는 잘 관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웅장한 성벽은 한 번쯤 볼만하다.
인도 남부에서 명상과 요가로 유명한 곳들이 몇 군데 있어서 며칠 더 시간이 있었다면 명상과 요가 수련을 해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