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초기 끝_여행시작_부산부터
임신 기간은 참 길다. 부산에 갔던 것은 꽤 옛날 일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때도 임신 중이었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3월에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예약했던 모든 여행을 취소했다. 그리고 다소곳하게 안정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몸가짐은 다소곳하려 애썼으나 마음가짐은 애가 탔다. 5월이 되었다. 이제 어디든 가고 싶다. 부산을 갈까 하니 친구가 부산 숙소를 예약해주었다. 착한 친구다. 그리고는 기차여행만을 허락했다. 차를 오래 타는것이 좋지 않다고 기차를 타라고 한다. 엄격한 친구다. 아침 6시 25분 출발 다음날 저녁 23시 51분 도착 기차표를 샀다. 친구는 내가 무리 하지 않도록 기차 여행을 권했지만 들썩이는 마음을 꽉찬 일정에 담았다. 나는 아침에 잘 일어난다. 특히 놀러갈 때 더 그렇다. 어릴 때 가족여행은 야반도주일 때가 많았다. 성수기에는 부모님이 새벽 두세시에 우리를 차에 태웠다. 차에서 자다가 눈을 뜨면 바다가 있었다. 짐을 싸다 보니 어느새 새벽 한시다. 6시 25분 기차를 타기 위해 5시에 알람을 맞췄다. 남편은 스스로를 부지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썩 그렇지는 않다. 그 날도 일어나기 힘들어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정신이 몽롱해보였다. 6시가 조금 안 되어 집을 나섰다. 새벽 공기가 상쾌했다. 서울역이 가까워서 다행이다. 맥도널드에서 남편은 잠시 눈을 반짝였다. 맥모닝을 해치우고는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을 잃고 잤다. 나도 잠깐씩 졸았지만 자꾸 깼다.
창 밖을 구경하며 부산을 검색했다. 이미 일정을 대충 짰었다. 원래 내 여행에서 맛집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볼지가 관심사였다. 그런데 임신부의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먹는 것 밖에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삼시세끼가 일정의 전부였다. 하지만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모든 일정을 새롭게 바꾸었다. 막상 기차를 타니 다시 어디를 가볼까로 관심이 기울었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근처 맛집을 다시 검색했다. 남편은 옆에서 계속 잔다. 남편은 거의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부산도 처음이었다. 부산역에 내리니 인증샷을 찍어야 한다며 들뜬 모습으로 뛰어다녔다. 렌트카를 찾으러 갔다. 남편은 경력 3개월차 운전자다. 그 사이 타이어 펑크 1회, 찌그러짐 2회, 접촉사고 1회라는 이력을 쌓았다. 굴하지 않고 열심히 운전하는 남편이 기특하기는 하다. 하지만 멀리까지 와서 사고는 싫다. 뱃속 아가의 안전을 위해 임신부인 내가 거의 운전을 했다.
첫 코스로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다. 입덧이 없어 꺼려지는 냄새 가리는 음식 따위도 없다. 하지만 괜히 상상으로 돼지국밥 냄새가 괜찮을까 싶던 차에 돼지고기와 국밥이 따로 나오는 곳을 발견했다. 돼지고기수육과 순대가 접시에 나오고 국에는 부추만 들어있었다. 깔끔했고 맛있었다. 이제 정말로 여행 시작이다.
감천문화마을로 향했다.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한 여름처럼 뜨거운 5월이었다. 가디건을 벗고 민소매 원피스만 입었다. 소풍을 나온 듯한 학생들 무리가 있었다. 날씨도 분위기도 여행다웠다. 여행 중의 여행다운 풍경은 나를 더 들뜨게 한다. 게다가 이 곳은내가 좋아하는 골목 걷기와 높은 곳에서 풍경 내려다보기까지 다 되는 곳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 손을 잡고 걸었다. 아기자기한 벽화와 조형물들이 골목마다 나타났다. 빛을 받아 화사하다. 조금 걷다가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좁은 계단을 올라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늘에 앉으니 바람이 시원했다. 멀리로 바다가 보인다. 그 위로는 색색의 지붕이 빼곡하게 차 있는 마을이다. 그 위에서 빙수를 먹는다. 같은 공기가 떠오르는 곳이 있다.
십년 전쯤 여동생과 함께 튀니지를 여행했다. 수스라는 휴양도시에 도착했다. 코트를 입어야 하는 겨울이었다. 휴양지 호텔 야외 수영장에 물은 채워져 있었다. 그 앞에서 사진만 찍고 택시를 탔다. 동생은 세 보이는 흑인 파마머리를하고 능숙한 불어를 하며 함께 다녔다. 사기치지 말라는 기운을 풍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택시기사는 우리가 타자마자 어떤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가격이 표시되는 숫자가 커졌다. 목적지에 금방 도착했다. 택시비는 수도인 튀니스 시내를 한참 달렸을 때보다 많이 나왔다. 세 보이지도 세지도 않은 우리는 아무 말도 못했다. 부르는 돈을 다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쌀쌀하지만 하늘은 맑았다. 벽들로 둘러싸인 처음 보는 골목을 걷다보니 택시비쯤은 잊혀졌다. 걷다가 카페를 들어갔다. 옥상에도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해를 가리려고 쳐 놓은 천이 바람에날렸다. 천국에 카페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라는 메모를 해두었었다. 적당한 바람과 온도 고요한 공기 멀리 보이는 풍경이 편안했다. 그 여행 이후 옥상 카페를 갈 때면 그 곳이 생각난다. 이태원에서 멀리 모스크가 보이는 옥상이 그랬고 여기 부산 감천문화마을 옥상도 그렇다.
마을의 시작부터 이 옥상까지전부 여행다워서 참 좋다. 임신 초기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답답했다. 그 시간 잘 보냈다고 칭찬해주는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한다. 부산의 첫 장소부터 응원을 받는다. 튀니지 기억까지 빌어 빙수를 다 먹고 다시 걷는다. 걸으니 또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내가 감탄하는 풍경을 어린왕자와 여우도 함께 보고 있었다. 남편은 어린왕자와 함께 셀카를 찍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천진난만하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다. 조심성 없는 그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기라도 할까 마음을 졸이는 건 나 뿐이다. 남편이 아기라도 안고 있다면 더 걱정이 될 것 같다. 남편이 아기를 안고 함께 어린왕자와 셀카를 시도하는 장면도 상상한다. 깔깔거리는 아기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직 나오지 않은 배를 어루만지며 얘기한다. “꿈꿈아 넌 좋겠다. 좋은 아빠를 만나게 되어서.”
+ 작년 봄, 임신기간동안 나와 뱃속 아가가 혼자인 듯 둘이서 함께한 일상여행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