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공감하고 위로하기 벅차다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의 부고 소식은 언제나 껄끄럽다.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다.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지금보다 무던해지고 진짜 ‘어른’처럼 굴 수 있으려나. 죽음이 아프고 슬픈 단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데, 이쪽이 취해야 할 감정선이 문제다. 특히 완벽한 타인이라던가 애매한 사이에선 너무 어렵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부터 알 수 없다. 슬픈 마음으로 묵도해야 할 것 같아 하긴 한다만. 진심처럼 상대가 느껴줄지 늘 의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단 말 한마디. 이걸로 충분한가? 무언가 가볍게 느껴져 불편하다.
몇 년 전, 알던 형이 죽었다. 암이었다. 생각해보니 이젠 형보다 나이가 많아져 기분이 이상하네. 대외활동을 할 때 알게 되었고, 종종 연락하며 지내던 사이였다. 아프단 얘길 전해 들었고, 병문안이래도 한 번 가보려 연락했었다. 근데 상태가 호전 중이란 말에 병원 밖에서 보기로 했다. ‘조금만 더 힘내시라’, ‘얼른 나와서 보자’ 따위의 응원 메시지를 끝으로 카톡 창을 닫았다. 근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두 달쯤 지났을까. 갑작스레 전해 들은 죽음에 아연해하다 조문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때 형의 부모님을 뵈면서부터. 누군가 겪는 상실감에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쭙잖은 한 두 마디 위로의 말조차 입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겨진 사람들. 심지어 앞날이 창창했던 아들을 보내야만 했던 부모님. 그날 마주했던 표정을 뭐라 형언해야 할지 모르겠다. 감히 표현해낼 자신이 없다. 저 멀리로 넘어가버린 듯한, 다신 이 세상에 발붙이지 못할 것만 같은. 굳이 써보자면 그런 부류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이쪽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이고서. 육개장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다 자리를 빠져나왔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홍콩 중견 배우인 오맹달 님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짤막한 몇 줄의 문장으로 덤덤히 전해 들었다. 모르는 사람도 많겠으나, 이쪽은 주성치 영화의 광팬으로써, ‘주성치 사단’의 일원으로 익숙하신 분이다. 주성치의 선리기연, 월광보합 시리즈만 하더라도 최소 수십 번은 보아왔으니. 그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연기는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다.
그런데 문득 그의 부고 앞에서도 어떤 감정을 느껴야 정상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왠지 슬퍼해야 정상 같다. 근데 슬퍼하기엔 고인을 추억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실 그분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기껏해야 영화 속 단편적인 모습뿐이다. 그마저도 그는 1995년에 개봉한 영화 속 시간에 멈추어 있다. 슬퍼해야 할 대상을 특정할 수 없으니 그간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도통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렴풋이 친숙하다 생각해온 그가 저 멀리 타국으로 떠나버렸다. 나중에 언젠가. 매번 보던 영화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땐. 지금과 다른 감정이 피어오를까?
슬퍼하고 싶은데, 슬픈 연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처신 똑바로 하며 살기 참 힘들구나.
가끔씩 울리는 페이스북 알림에 시선을 뺏길 때가 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종종 보여서다. ‘XX’님 글에 댓글이 달렸단다. 남겨진 사람들의 그리움과 마주한다. 어떨 땐 위에서 얘기했던 형의 이름도 보인다. 그가 이 세상에 있다 갔단 사실을 남겨진 이들에게 잊힐까 두려워하는, 간절하고도 사무치는 단말마가 눈에 띈다. 매번 마음이 무겁다. 쉽지 않다. 정말로 쉽지 않네. 결국 오늘의 문장 역시 끝맺지 못한 채, 침대에 누인 몸을 뒤척인다. 잠이 달아났다. 페이스북 알림 끄는 법을 검색해보려다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이 세상은 슬픈 소식들로 가득한데. 모든 순간에 적절히 행동해낼 자신이 없다. 본디 사람으로서 행해야 말과 행동은 알고 있으나, 무의미한 연기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나의 머릿속은 늘 느낌표보단 물음표, 혹은 말줄임표로 애매하고 어색하게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