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 뭐 처음부터 삼삼하고 싶었나?
눈물이 났다.
그가 쏟아내는 음악이 너무 뜨거워서,
내 안에 담긴 것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드라마를 보다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이 나이를 먹고도 종종 수도꼭지가 고장 나니 곤란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종영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 첫 회를 보던 도중이었다. 무대에 서고 싶지만 실력 때문에 설 수 없던 여자 주인공. 그녀는 음향실 작은 창 틈으로 무대를 바라본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남자 주인공. 그렇게나 바라던 무대를 멀리서 쳐다볼 수밖에 없는 처지. 그가 쏟아내는 뜨거움에 눈물 흘리던 그녀, 그리고 처연하게 읊조리던 내레이션에서 공감해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심장에 말뚝이 박히듯. 나 혼자 숨겨놓았던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귓불이 빨개지며 눈물이 났다.
누구보다 사랑할 자신이 있고, 잘 해내고 싶은데 말이다. 애당초 내 안에 담긴 것이 너무 작고 초라하다. 작고 초라한 주제에 남이 가진 위대함은 알아볼 깜냥은 되어서. 근데 또 절대 이 손에는 잡힐 리 없는 햇살 같은 존재라서. 남이 붉게 태우는 석양을 작은 틈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선망과 동경. 질투와 자책.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시선은 최소한 같은 공간에서 맞부딪히기라도 했지 않겠는가. 아픔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그 얽히고설킨 이쪽의 시선은 저 멀리 무대 뒤편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한 모든 순간이 너무나 닮아있어서. 주책맞게도 눈물이 차올랐다.
나름 잘 넘어왔다 생각했는데. 미련이란 녀석은 참으로 지독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서른셋. 서른 살로부터도 삼 년이나 흘러간 나이. 서른 살은 이립(而立)이라고 부른다. 공자님께서는 그 나이 즈음이면 학문의 기초를 세우고 바로 서는 때로 보셨대서 그렇단다. 그렇게 따지면 서른셋은 기초공사가 끝내고서도 삼 년이란 시간이 더 흘러간 거다. 지난해는 한국 나이 서른셋, 올해는 만 나이 서른셋.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지나치는 삼삼함. 기초공사라던가 바로 섰는진 모르겠는데 말이지. 어영부영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2020년 12월, 삼삼함도 이제는 만으로 꽉 채워 여기까지 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맹숭맹숭한 듯 깊은, 그 묘한 마력 같은 나이를 지나치고 있다. 평양냉면으로 따지자면, 면이랑 고명이랑 다 건져먹고 마지막 한 모금 육수를 목전에 둔 상태다. 심지어 조금 아쉬운 포만감마저 똑같으니 진짜 한 그릇 뚝딱한 기분이다. 아 아쉬워라 아쉬워.
작년 한 해 넘겨온 순간을 뒤로하고 올해는 진짜처럼 살아내 보려 했는데. 코로나다 뭐다 해서 정신없고 얼떨떨하게 흘러가버렸다. 그럴듯하게 살아내는 일에 만족해보려 했는데, 삼삼하게 살기에도 팍팍했던 한 해. 올해는 또 어찌 살아냈나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어 진다. 이렇게 또 안녕이로구나.
그런데 말이다. 한 가지는 고백하고 넘어가겠다. 삼삼함을 추구하기로 했던 일과는 별개로, 처음부터 당신의 목표가 삼삼함이었냐 물으신다면. 살짝 찡그린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 사실 그 누구보다 자극적인 맛을 추구했었으니까. 평양냉면을 참 좋아하기로 서니, 인생사 목표마저 평양냉면이고 싶진 않았다. 왜, 호불호 타지 않고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맛들 있지 않은가? 갈비찜이라던가 떡볶이. 혹은 노릇노릇 잘 구워진 티본스테이크라던가 송로버섯처럼 풍미 가득한 삶도 있겠지.
자극적이고 화려하며, 짜릿하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멋지고 반짝반짝 빛나고 싶었는데. 무수히 빛나는 별들을 머리 위에 아로새기고 살고 싶었다. 좋은 대학이라던가 음악에 대한 꿈도 있었지. 누가 봐도 성공한 삶이라던가 죽고 못 사는 불꽃같은 사랑 같은 무수한 반짝거림. 갖고 싶은 게 참 많은 욕심쟁이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꺼져가는 전구들을 하나씩 치우다 보니 서른셋, 여기까지 왔다.
무수한 궤도 수정 끝에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았다. 내 안에 담긴 무수한 초라함을 아파하고 인정하며,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다. 내 인생을 걸고 짝사랑을 심하게 앓다 빠져나왔다. 닿지 못할 반짝임을 바라만 봐도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슴 떨려하는 일만으로도 행복하다 점차 비뚤어지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상대에 분노하고 좌절하고 아파했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대로 주저앉아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스스로 잘 이겨내든, 신포도이길 바라는 여우의 심정이 되어 물러나든. 어떻게든 말이다.
이 세상 속 주인공이 되기란 왜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 엔딩 크레딧에서 태양처럼 솟아오르는 첫 번째 배우의 이름처럼, 온갖 서사와 사건 속에서도 빛나고 싶었는데. 남과 나를 비교하는 일이 스스로를 좀먹는단 사실 정돈 배웠는데 말이지, 무언가 빛나고 있는 누군가와 마주할 때면 여전히 부럽고 질투가 난다.
어찌하겠는가. 내일은 또 월요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고, 이쪽은 이쪽의 삶을 살아내야지. 그래도 매일매일 결벽증적 번뇌와 타협점을 찾아가는 가속도 사이에서 번갈아 고민하다 보면 말이다. 하루하루가 새롭다. 조금은 번거롭고 에너지 소모가 큰, 일상적 방전이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누가 뭐라 해도 나 자신만큼은 자기애가 폭발해야 하지. 손에 쥔 재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채우지 못했다면 가진 걸로 승부 볼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평양냉면으로도 미슐랭 별을 따낼 수 있는 세상이니까.
이번 생은 삼삼하게 살기로 작정했다. 내 나이 서른셋, 삶의 첫 단추를 끼우고 바로 서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삼삼한 삶이란 썩 나쁘지 않은 지점에 있으니까. 불꽃놀이처럼 화려하진 않고,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처럼 애처롭고 절망적이지 않은 그 지점. 촛불 같은 생애. 너무 꿈만 좇지도, 현실처럼 팍팍하지도 않은. 데리야끼 소스를 뿌린 닭가슴살 스테이크와 같길 바라는 오늘의 하루.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오늘 이 순간을 앞으로도 사랑해줘야지. 아껴줘야지. 아쉬울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그런 삶의 태도로 말이다.
삼삼한 삶처럼 삼삼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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