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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Aug 09. 2020

꿈은 현실이다.

이번 생의 비망록.

오빠는 인생의 목표가 뭐예요?


   침대에 널브러져 전화를 받다 등허리에 비수가 꽂혔다.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린 터라 말이 나오질 않는다. 폐라도 찔린 걸까?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어 보지만 정신이 혼미해진다. 품에 박힌 칼날에 ‘양심의 가책’이란 독이 발라져 있던 모양이다. 간신히 ‘작가가 되는 일이라고, 단 한 줄이나 한 장의 사진이 본인의 명함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고선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내질렀다. 부끄러워 버틸 수 없던 터라서. 잘 익은 토마토 색깔로 귓불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거짓말이 아니다. 틀린 말도 아니지. 진짜 되고 싶은 모습이다. 오늘은 아니래도 내일이라던가 모레, 혹은 십 년, 이십 년 뒤 갖추어질 모습이길 꿈꾼다. 다만 이토록 소스라치게 겸연쩍어하는 이유는 ‘말뿐 아니라 실제로 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첫 번째 화두에서부터 마음이 덜컥 주저앉기  때문이다. 평소 숙제 검사를 하지 않는 선생님께서 오늘따라 ‘다들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 한 번 해볼까?’ 라시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계신 격이다. 이쪽은 어쩔 줄 몰라하며 교탁 밑으로 숨어버리는 학생이지. 심장이 회초리로 맞은 양 아리고 쓰리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본인만은 알고 있는 부끄러움.


   변명거리는 늘 차고 넘쳐 문제다. ‘치열하게, 또 하루를 소중하게’. 좋은 말이다. 너무 좋은 말인걸 알아 탈이지. 인생의 목표를 향해 매일매일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백 년 남짓 짧은 생애일지라도 허투루 쓰는 법 없이 뜨겁게 산다면. 누군가에게 어둠 속의 빛과 같은 삶이 되어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쪽은 본업이 직장인인걸. 최소한 하루 8시간은 적금처럼 빼놓아야 한다. 그리고 못해도 6시간은 자는데 할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10시간, 아니 출퇴근 시간에 밥 먹고 뭐하는 시간에 이거 저거 제하고 나면 6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 글을 쓰다 말고 방석을 찾았다. 얼굴을 파묻고 또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시간이 없다 없다 하더니! 순 거짓말쟁이! 하루에 6시간은 있었다고??? 진짜 백 번 봐줘도 4시간은 남겠네!  인생 최대의 시간 횡령 사건 앞에서 황망해졌다. 자세를 고쳐 잡고 거울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짜 정말로 작가가 되고 싶긴 한 거니? 


   어렸을 때는 ‘대단’한 사람이 되길 바랐고 이십 대에는 ‘나의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었다. 지금은 한 장의 사진, 한 줄의 문장이 명함이 될 수 있는 사람이 꿈이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추상적인 사람이었구나 싶다만, 안개를 걷어내고 핵심을 찔러보면 결국 똑같은 결이다. 인정받고 남겨지는 삶을 살고 싶다. 이타적이냐 개인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존재 이유를 세상에서 찾는다. 육신과 혼이 바스러지고 가루가 되더라도 나의 생애만큼은 고결해지길 바란다.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작가인 거다. 영원불멸한 삶을 살기 위해 택한 이번 삶의 뮤즈. 


밝게 빛나길.


  그렇지만 올해 들어 자꾸만 조바심이 어깨를 짓누른다. 인생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황망해하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해서일까? 30대라는 숫자의 무게가 문득 체감돼서 일까? 10대의 패기와 20대의 열정으로는 못할 게 없어 보였으나 30대에는 자꾸만 현실적인 단어들이 입가에서 삐져나온다. 사람을 대할 때나 사랑을 품을 때도,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때도 말이다. 망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아이는 점차 현실과 실현 가능성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늪을 이루던 오만가지 감정의 물길 앞에 댐이 세워진 기분이다. 덕분에 매번 홍수가 나던 대지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지만, 늪 바닥은 점차 메말라간다. 되고 싶은 건 확실한데 되어가는 모양새는 물음표 백개다. 거기서부터 조바심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지금처럼 해서 그곳에 닿을 수 있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잇값은 하고 살아야 할 것만 같은 자책감은 압제나 탄압이 아니니까.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과 남은 시간 사이에서 정신 차리게 되는 과정일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질문의 답은 역시 나에게 있다. 언제나 그렇듯, 여기에 있지. 여전히 좌충우돌인 일상이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나답게 하는 건 역시 꿈밖에 없으니 말이다. 목표에 닿지 못한 허풍선 일지 대기만성형 삶을 이뤄낼지는 나중 문제다.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럽더라도, 지금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지라도 말이다. 결국 나에게로 다가와 꽃이 되어줄 단 하나의 무언가는 이 속에 있다. 그 사실만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리 조바심 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자신만의 삶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한다. 


비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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