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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May 10. 2018

Remember

우리 사이에 쌓여온 소소한 기억들.


그 날의 맛을 기억해. 대체로 뚜렷이 남아있는 기억들은 여러 가지 감각의 재생을 동반한다.



기억 속 그 날 유난히 버석이던 공기부터 손 내밀어 잡았던 그릇의 온기, 피어오르는 음식의 향기, 건네주던 엄마의 말투에 함께 식탁에 앉은 가족들의 찰나의 표정까지도. 꼭 꿈속을 보는 것처럼 대체로 자신이 했던 말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고 처음 입에 넣었던 그 한 숟가락. 분명히 음식의 맛이란 객관적인 현실일 텐데. 기억 속의 그 날의 맛이란 이토록 여러 가지 감각이 순간적으로 한 덩이로 얽혀 주관적으로 머릿속 어딘가에 남겨진다. 매일 세 번씩 지나가는 모든 식사와 요리가 어쩌면 그렇게 동일하게 저장되겠지만, 어느 날 다시 비슷한 감각을 만나면 그 순간이 즉각적으로 떠오른다. 때로는 모든 순간의 기억이 재생되기 전에, 맛에 대한 감각만큼은 본능적으로 되짚어진다. 먹어 본 맛이라고. 그게 언제 어디였는지 몰라도 이 맛을 기억한다고.



#01. 파이라고는 '후렌치 파이'밖에 모르던 시절, 미국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된 엄마 친구 집이었을까. 뜨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애플파이가 거의 세숫대야 크기로 테이블에 올라왔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뚜껑이 덮인 파이를 처음 봤으니까, 그 안이 얼마나 뜨거운지 가늠할 길이 없었고. 엄마가 말릴 새도 없이 숟가락으로 욕심껏 크게 한 숟가락을 떠 넣자마자, 입천장이 까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입안은 뜨겁게 아려오고 혓바닥은 마비되는 것 같은 와중에도, 시큼하고 달콤한 사과 덩어리가 큼직하게 씹히고 진한 계피 향이 온 콧 속을 파고들었다. 온 입안에 들러붙어 뱉을 수도 없었던 그 미국식 애플파이의 농도 짙은 맛과 향은 그 온도만큼이나 뜨겁고 진하게 기억 속을 파고들었다.    



#02. 한 번은 코펜하겐의 숙소 게스트 하우스에서 로열 코펜하겐 본점으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찬바람은 돌바닥 길을 따라 여행자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긁어댔고, 겉옷을 여미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뛰다시피 광장을 지나 본점 건물이 보일 즈음 광장 귀퉁이에 독특한 노점을 하나 발견했다. 분명히 노점상 가판대인데 그 안에는 각종 건과류와 견과류가 종류별로 가득. 그 옆에는 우리나라 군고구마 깡통보다는 몸집이 조금 더 크고 위로 굴뚝같은 통로가 올라와 자그마한 기차같이 보이는 구리 깡통이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기웃대 보니, 누군가가 견과류를 고르면 그 깡통에 넣어 볶아내고 그 위에 뜨거운 시럽을 부어주고 있었다. 



주머니에 집히는 만큼을 건네고 호두를 가리키자, 내게도 빨간 종이콘이 하나 따끈따근한 호두가 시럽과 함께 부어졌다. 지금도 호두를 먹을 때마다 문득 달큼하고 고소하고 바삭하게 광장을 누비던 그 날의 기억이 따라온다.


 

#03. 맛에 대한 기억은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을까. 시골에서 혼자 사시던 할머니는 유난히 당신의 간식거리들을 손주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벽장에 감춰 놓고 혼자 하나씩 꺼내 드시곤 하셨다. 어린 마음에는 손주들 준다고 두 시간씩 밥솥으로 쪄서 만들어주신 카스테라 보다도 우리 몰래 꺼내 드시는 할머니의 그 무엇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한 개만 주면 안 되냐고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도 그것만큼은 내어주시지 않았다. 장날 손주 둘을 데리고 이것저것을 사 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내게 주어진 봉지 중에 할머니의 군것질거리가 있었다는 걸 모르셨던 것이 사건의 시작. 봉지 속에서 가장 큼지막한 조각을 하나 손에 감춰 들고 뒤뜰로 숨었다. 거의 손바닥 반만 한 편강을 한 입에 넣고 씹었다. 



생강의 맵고 알싸한 맛이 온 입을 덮었다. 그 해 여름 가장 크게 울었다.



맛에 대한 기억은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을까. 

언젠가 급히 먹다 입천장이 데일 것만 같았던 애플파이의 뜨거운 계피 향기처럼. 

추운 날 아침 코펜하겐의 거리에서 만난 뜨거운 시럽을 부은 호두처럼.

어린 날, 맛있게 드시던 할머니의 간식을 뺏아 먹다 울어 버렸던 아린 편강 한 조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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