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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Nov 13. 2020

일 년 동안.

calendar. record the past and the future

매년 11월이 다가오면, 새해 달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곤 한다. 벌써 한 해가 이만큼이나 저물었다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오늘 하루는 너무 긴데, 정신을 차려보면 일주일은 금방 지나가는> 올해는 그런 날들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만으로 가득 차 있던 상반기, 유독 하루가 길고 피곤하고 숨 막혔다.


음악시간에 배웠던 음악기호로 따지자면 라르고(Largo). 아주 아주 느리게. 지금껏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코로나의 그늘 아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느리게 매일을 지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휴가가 넘치게 있어도 갈 수 있는 곳이 없는 기막힌 나날들을 지나며, 빈 시간에는 늘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매일의 해야 할 것, 수많은 to do list에 끌려가던 일상의 족쇄가 이렇게 한 순간 전 세계적으로 풀릴 수도 있다는 걸, 작년 이맘때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달력에는 지난 한 해의 기록이 겹쳐진다. 지난 한 해의 시간들을 돌아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재료나 음식 또는 활동을 사진으로 골라 넣기 때문이다. 작년 달력을 만들 때까지만 해도 큰 주저함 없이 사진들을 골랐다. 지난 3월엔 우리가 무엇을 만들었을까. 이 계절엔 무얼 먹으면 좋을까 같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계절감이 잘 드러난 과거의 사진들을 고르고 미래의 날짜들을 입혀 인쇄를 넣었다. 유일한 걱정이 있다면, 인쇄가 너무 어두워 사진의 색감이 망가지지 않을까 정도. 그런데 올 해는 마음이 복잡했다. 솔직히 지난 한 해의 시간들을 돌아보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새로 다가올 한 해를 예상해 보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올해 같은 내년이 아니길 바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가장 좋았던 한 가지를 꼽으라면,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 그렇게 수많은 원인들과 대책이 쏟아져도 해결되지 않던 뽀얀 하늘이 단번에 이토록 푸르게 개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춰서는 그 짧은 순간, 반대로 자연이 회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억측이 심한 걸까.



모두를 위해 스스로의 일상을 쉬어가는 그 순간 속에서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지나가고 다가오는 계절만큼은 위로가 되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시간조차도 끝을 향하여 동일한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지난여름 살구로 시작되는 첫 과실들이 쏟아질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계절에 따라 순리대로 나오는 과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는 일을 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 여기 있었다. 지금 넘치는 과실들을, 거두고 저장하는 작업이다. 머리가 복잡할 땐, 의외로 손으로 하는 단순 작업이 우리를 쉬게 만들어 준다.



코로나를 맞이하고 얼추 세 계절을 보내다 보니, 이제는 다들 현 상황에 적응하며 지내기 시작한 것도 같다. 집 밖을 나설 때 마스크가 없으면 허전하고, 옆자리에 사람이 붙어 있으면 자연스레 떨어져 앉는 것처럼. 그렇게 버릇이 든 것 중 하나가 집에서 해 먹는 식사다. 상황에 따라 외출 제한이 잦다 보니 배달에 질리는 순간, 집에서 해 먹는 방법 밖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재료 손질까지 마쳐놓은 밀키트 제품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도 사실. 흥미로운 점은, 상황에 따라 일상을 누리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제철의 식재료들은 동일하다는 점이다.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달력에 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뱅뱅 돌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과 동일하게 다가올 우리의 계절들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담아내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새로 시작되는 한 해에 다시 기대하는 마음을 담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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