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몸과 마음을 챙기는 패션이 떠오른다.
의식주에서 옷이 가장 먼저 있는 이유는, 옷이 착용자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외부의 위협을 막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대부분의 ‘코트’나 ‘카디건’ 역시도 참혹한 전장에서 병사들의 활동성과 보호를 위한 옷이었던 것처럼, 옷의 기본은 언제나 착용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이었다.
아, 물론 이런 무거운 의복의 역사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번 글은 대역병의 시대와 이 이후에 과연 어떤 옷이 필요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가 집에만 있더라도 시즌 바뀌고, 패션은 이를 따라가니까. 영화 ‘이퀼리브리엄’처럼 디스토피아적 사회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대역병’이 유행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전쟁터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무기로 매일매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최전방에 있는 우리에겐 편안함과 보호를 위한 옷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21년도 SS시즌에는 편안함, 기능과 같은 기본에 집중한 옷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이번 글은, 21년도 SS시즌 트렌드와 맞추면서 앞으로도 꾸준히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아이템을 몇 가지 추천해보고자 한다.
응팔 정봉이가 입을 것 같은 약간 촌스러운 스웻 팬츠에 파스텔 톤의 오버사이즈 니트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 보자. 이상하다고? 거기에 약간 큰 듯한 오버핏의 코트까지 걸쳐보자. 더 이상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편하지 않은가?
이번 시즌의 트렌드 키워드는 ‘편안함’과 ‘기능’이라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90년대 TV 쇼에서 나올 것 같은 촌스러운 스웻 팬츠와 약간 못생긴 러닝화가 당신을 ‘트렌디’하게 만들어 줄 조합이다.
라운지 웨어와 데일리 웨어의 믹스매치는 코로나 시대에 걸맞게 떠오르는 하나의 트렌드이다. 방역을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행하면서 실내, 그것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매우 많아졌고 또 일상을 집에서 혹은 방에서 보내고 있다. 물론 생필품을 사기 위해 혹은 다른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외출은 한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우린 일상의 야외 활동이 줄어들고 실내 활동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다시 말해, 생활권을 나누던 선이 모호해졌고 덕분에 ‘라운지 웨어’로 통하는 홈웨어와 외출을 위한 ‘데일리 웨어’를 섞어 입는 약간 ‘엥?’하는 스타일이 트렌드로 떠오르게 되었다. 결국, 집에서 과자 먹다가 동네 친구가 불렀을 때, 혹은 편의점에 잠깐 맥주 사러 나갈 때 어울릴 것 같은 옷차림으로 나간다고 이제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 넉넉한 스웻 팬츠, 맨투맨, 후디 혹은 따듯한 카디건과 함께 걸치는 큰 코트는 당신을 이 시국의 트렌드 세터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김치 국물 같이 눈에 확 띄는 오염이 있는 츄리닝 바지나, 한겨울에 집에서 입고 있던 귀여운 수면바지 혹은 다 낡은 아디다스 삼선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만약 이 뉴 노말 트렌드를 즐기고 싶다면, 기억하자 ‘깔끔함’을. 나중에 유행이 지나면 그땐 집에서 입어도 되니까, 손해 보는 것은 없는 것도 덤.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가 전 세계의 남성복 바지의 디폴트를 ‘슬림’으로 만들어 놓은 지 어언 10년 이상 지나가는 지금, 2000년도의 넓은 카고 바지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할 때가 되었다. 슬림핏의 바지를 접어두고 레귤러 혹은 와이드 핏의 바지로 다리의 편안함을 챙길 때가 되었다고 모든 브랜드들이 말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스웻 팬츠처럼.
슬림핏 바지에 바람 잘 날 없으니까.
약 3년 전부터 바지통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필자도 2년 전에 레귤러 청바지를 추천하는 글을 적기도 했다.) 하지만 그땐 여러 가지 부류 중 하나의 ‘스타일’이었다면 이젠 이 통이 넓은 바지들이 주류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물론 2002년도의 패션은 가져올 필요 없다. 이번엔 흑역사 아닌 세련미가 필요 하니까.
어찌 보면, 통 넓은 바지의 유행이 따듯한 계절 특수를 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칼바람 부는 한겨울에 통 넓은 바지를 입는 것보다 봄/여름처럼 따듯한 날씨에 통 넓은 바지를 입는 게 좀 더 어울리기도 할 테고. 하지만, 다가올 미래 시즌의 바지들이 펄럭이면 펄럭였지 다시 다리를 조여오진 않을 것 같다.
만약 통 넓은 바지의 밑단이 내 신발을 살짝 덮은 모습이 촌스럽다고 생각된다면 일단 밑단을 접고 시작하자. 턴업(한번 크게 접어 올리기), 롤업(여러 번 접어서 올리기), 트림 업(좁게 여러 번 접어 올리기)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통이 넓은 청바지/면바지를 접어 올리면서 일단 넓은 바지의 통과 익숙해지자.
이것도 힘들다면 레귤러 핏의 바지도 답. 슬림 핏의 바지만 입다가 갑자기 넓은 통의 바지를 입게 된다면 나의 다리에 불러오는 산들바람에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레귤러 핏 바지를 한번 입어보자. 어렵다고? 디키즈 874 워크 팬츠나 리바이스 501, 505를 사면 된다. 이건 누구도 무시 못하는 레귤러핏의 원조들이니까.
옷의 ‘기능’하면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방수, 방풍 원단으로 만들어진 재킷, 아무리 구겨도 방금 다림질한 것 마냥 펴지는 바지, 혹은 빠르게 마르는 운동복 등. 하지만 개인적으로 ‘주머니’가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환경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가방이니까. 이번 시즌엔 이 의견과 동조하는(물론 이건 아니겠지만) 많은 브랜드들이 이 기본적인 기능에 집중한, 아니 조금 과도하게 집중한 옷을 내놓았다.
옷 앞섬에 빼곡하게 달린 주머니를 본다면 얼마나 이들이 주머니에 진심인지 알 수 있다. 옷만 입고 가도 1박 2일은 거뜬히 버틸 것 같은 이 옷들을 보면 ‘이걸 입는다고?’ 할 수 있다. 또 다수의 명품과 하이엔드 브랜드의 옷들에 으레 비싸고 부담스러운 스타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당신에게 주머니가 많이 달린 사카이의 옷을 꼭 구매하라는 건 아니다.
적당한 주머니는 당신의 위트를 보여준다.
주머니가 많이 달려있지만, 우리가 불편을 느끼지 않는 기존에 입는 옷이 있다. 바로 ‘야상’. M65, N3B 등 많은 야상이 있지만, 다가오는 봄에는 M1943 스타일의 옷을 시도하는 것은 어떨까?
많이 봤을 것이다. 사실 가장 기본적인 군복의 시초가 되는 모델이고(다시 말해, 당신이 군필자라면 한 번쯤은 비슷한 실루엣의 옷을 입었을 것이다.) 이미 많은 회사에서 만들어낸 모델이니까. 그리고 사실, 이 ‘익숙함’이 추천의 이유이다. 이미 익숙하다는 건 당신이 ‘주머니’의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면서 아주 간편하게 이 유행을 당신의 옷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티셔츠, 후드 티셔츠 등에 걸쳐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해도 되고, 셔츠에 타이를 입고 걸쳐 ‘남성적인 모습’을 더 강조할 수도 있다. 군복이기에 활동성에 의한 편안함은 물론이고, 기능까지 챙긴 옷이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만약 이 ‘군복’이 당신의 외상 후 트라우마의 기폭제가 될 것 같다면, 눈을 돌려서 군복이 아니라 노동복, ‘초어 재킷’을 한번 눈여겨보자.
초어 재킷/코트는 당시 노동자들을 비롯한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육체노동에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19세기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작업복이다. 이후 미국 혹은 영국 등의 노동자들이 입기 시작했고, 당시의 이름은 ‘색 코트(Sack Coat, 정말 포대자루처럼 펑퍼짐한 겉옷이었기 때문에)’ 혹은 ‘레일로드 재킷(Railroad Jacket, 철도 노동자들이 입었기에)’, ‘커버올(Cover all, 점프슈트가 아닌 엉덩이를 가리는 기장의 겉옷)’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초어 재킷 혹은 초어 코트라는 이름은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쨌든, 이 옷은 단단하고 질겨서 어떤 충격에도 쉽게 찢어지지 않는 원단, 착용자의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한 느슨한 핏, 여러 가지 소도구를 넣을 수 있는 다수의 널찍한 주머니와 소매를 쉽게 겉을 수 있는 커프스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기원부터 편안함과 기능을 겸비한 ‘노동자’를 위한 옷이다. 이 덕분일까? 초어 재킷은 수년 전부터 수면 위로 올라온 워크웨어의 트렌드를 선도하며 다수의 브랜드가 제작하고 있다.
물론 이 기능적 편안함과 쉬운 접근성도 추천의 이유지만, 걸칠 때 갖게 되는 부담이 적다는 점이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옷이었기 때문에 격식을 갖출 필요도 없고, 후드, 티셔츠, 니트, 면남방처럼 평소에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옷과 함께 편하게 걸칠 수 있는 아우터로 볼 수 있다. 오랜 기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칼하트의 ‘초어 재킷’ 모델이 그 예.
매번 편안하게 걸칠 옷으로 야상을 구매했다면, 이번엔 PTSD를 불러올 만한 실루엣보다 자유로운 감성이 담겨있는 초어 재킷은 어떨까? 많은 주머니, 워크웨어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간절기에 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챙길 수 있는 옷이니까.
미니멀리즘은 언제부터인가 도시에서 지내는 현대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과거와는 다르게 이동이 잦은 현대인의 특성상 물건은 최소화하되 필요한 것은 꼭 챙기는 새로운 유목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만 미니멀리즘의 특징인 ‘필요한 것만 챙긴다’는 것이 이번 코로나 시대에 정확하게 사람들의 니즈를 저격한 것일까, 많은 브랜드가 필요에 의한 기능을 갖춘 미니멀리즘 옷을 내놓았다.
설명이 더 이상 필요할까 싶을 정도의 미니멀리즘이 가득한 프라다의 런웨이. 이는 대 역병의 시대에 기본적인 아름다움만 갖춰도 당신을 표현하는데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깔끔한 실루엣의 옷으로 가득 채웠다. 물론 프라다만 그런 것은 아니고, Jil Sander나 Off White 까지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옷을 구비할 때.
이런 미니멀리즘과 에센셜이 런웨이에 올라온 이유 중 하나로, 코로나 시대에 다수의 사람들이 외출을 하지 않으면서 의복의 구매율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 일 수도 있다. (물론 명품 구매는 큰 영향이 없거나 더 늘었다는 보고도 있지만.) 혹은 역병의 시대를 지나면서 과열된 패션계에 가장 기본적인 실루엣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미니멀리즘은 최소한의 디테일과 함께 ‘옷’이라는 형태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다시 말해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이라는 것. 즉, 스타일과 트렌드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질이 좋은 제품을 구매해서 꾸준히 관리하며 입는 게 가장 중요하다. (처음에 썼던 남자에게 필요한 셔츠처럼) 그렇기 때문에 이런 스타일이 떠오르는 이번 시즌,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을 한번 눈여겨 보자. 명품을 단 한 번도 구매하지 않은 당신이라도 한 번쯤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명품의 퀄리티가 최고라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여기저기 쉽게 걸칠 수 있는 튼튼하고 만듦새 좋은 니트를 구매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코로나가 우리의 많은 것을 앗아가고, 또 앗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내 끝나리라 믿고 지금의 시기를 준비하는 시기로 생각하자. 코로나가 끝나고 한창 놀러 나갈 때, 그 누구보다 멋져 보일 수 있게 준비하는 시기로.
다들 힘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