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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인 Oct 30. 2022

3000번의 오디션탈락.

내가 삼킨 말.



배우 생활 10년차, 대략 몇번의 오디션 탈락이 있었을까.

직접 콜이 와서 대면 오디션을 보러 간 것 뿐만 아니라, 제작사에 직접 프로필을 제출하거나 간단하게 이메일링으로 학생들 단편영화에 프로필을 제출한 모든 지원까지 포함하면 나는 지금까지 몇번의 작품에 지원을 했을까.

거기다 내가 모르는 순간에, 감독과 캐스팅디렉터가 프로필을 두고 나를 부를지 말지 고민하다 결국엔 부르지 않는 그 수많은 수들까지 포함하면.



못해도 일년에 300작품, 10년 가까이 3000번은 지원하고 떨어지지 않았을까.

눈뜨고 일어나 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눈 감고 자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계속해서 

불합격의 연속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수 없이 검열당하고 검색당하고 판단되어 가치가 매겨진다.

매일매일이 거절과 탈락의 연속.


그렇다면 그건 배우로서 실패한 인생인걸까.


지금까지 내가 독립영화 상업영화 Ott 드라마 연극 광고 뮤비 화보 등에서 크고 작게 참여한 작품들이

어림잡아 총 100개는 넘을 것 같으니, 30대 1정도의 확률이라고 봐야할까.


10년동안 고시공부를 한 사람, 10년동안 사업실패를 한 사람, 10년동안 작품을 준비하는 예술가들을 보면서

끝까지 하세요. 당신은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포기하지 마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정작 내 커리에서조차 매듭을 짓지 못하니 말의 힘이 여간 약해질 수 밖에 없는건 사실이다.



지난 여름 진행된 한 미팅에서 내 프로필을 훑던 심사위원이 내게 특기를 물었다.

나는 꽤나 자신있는 외국어 연기들과 아나운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심사위원이 그런 말을 했다.


-좋아요. 잘해요. 솔직히 손색없어요. 그런데 그런거 말구요. 

진짜 김초인씨가 누구보다. 그 누구보다 자신있는거 있어요?


할 말이 없었다. 그 누구보다 잘하는 거. 내가 그런게 있긴 할까. 특기라고 써놓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있는건 아닌거 같은데. 그게 뭐지.

이어 그가 말한다.


-본인이 지금까지 왜 안됐다고 생각해요?


그 말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건, 공격이 아니라 정말 순도 백프로의 궁금함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추리에 보답하듯 그도 이어 말했다


- 정말로 내가 너무 궁금해서 그래. 김초인씨는 분명 잘 됐을법한데, 도대체 왜 아직까지 안된거에요?


그 말을 들으니 누군가가 내게 지나간 듯 한말이 떠올랐다.


- 초인아. 넌 진짜 운이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안된거야.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돼. 넌 진짜로 잘 될수 밖에 없는 애야.



그 말을 들었던 순간, 심장이 지구내핵까지 빨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3000번의 불합격이 있었다면, 그 때마다 3000번의 이유를 찾아헤맸었다.

예쁘지 않아서. 혹은 애매하게 예뻐서. 못생겨서. 통통해서. 혹은 너무 말라서. 촌스러워서. 화려해서.

낯을 가려서. 매력이 없어서. 착해보여서. 못돼보여서. 섹시하지 않아서. 끼가 없어서. 재능이 없어서.

연기를 못해서. 상품성이 없어서. 이미지가 안맞아서. 멍청해보여서. 똑똑해보여서. 독해서. 독하지 않아서.

나이가 많아서. 나이가 어려서. 경력이 없어서. 경력이 많아서. 돈이 없어서. 돈을 안써서.

그냥 별로여서. 그냥 맘에 안들어서. 


무명이든 유명이든 직업으로서의 배우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쉽지 않은 이유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도 나를 뽑지 않겠다는 비하적인 마음의 충돌.

매일매일 나에게 부족한 점을 찾아 채우기 바빴다.

그렇게 채워나가는 것이 성장이고 성장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거라는 믿음하에.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수많은 이유들 중에서 단한번도 내 탓이 아닌 남탓을 한적이 없었던걸 깨달았다.

내가 운이 좋지 않아서. 운이 없어서. 그래서 안된거라는 말이.

남들이 들으면 절망적일 수 있는 그 말이. 누가 들으면 오만한 핑계라는 그 말이.

내 모든 시간을 위로해주는 말이 될 줄이야.

이 멍청이들아 날 왜 못알아보는거야 라고 꿍꿍 숨겼던 마음 속 깊은 위선을 들킨 것 같으면서도

하루 끝마다 일렁이는 내 부족함들을 직시하며 거듭했던 불면과 우울의 굴레 속에서

드디어 정착지를 찾은 , 반짝반짝 빛나는 면죄부.



미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탄 버스가 한 대학을 지나쳤다.

내 고딩 수험생활 내내 갈거라고 확신했던 대학. 스카이는 당연히 갈거라고 자만했던.

모의고사 시험지를 채점할 때마다 나는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다.

답을 맞추는 것은 당연한거고, 동그라미를 치는 손목스냅의 근력조차 쓰고 싶지 않았고, 덩달아 이만큼 맞았어! 라는 교만함을 스스로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틀린 부분만 체크하며. 내 약점들, 고쳐야할 것만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

그랬던 나는 보기 좋게 원했던 대학들을 다 떨어졌다.


생각해보니 그랬구나.

배우 이전에도 나는 참 많은 탈락과 거절과 불합격이 있었구나.


특기가 뭐냐고 물어본 심사위원의 질문이 떠오른다.

누구보다 잘하는게 뭐냐는 그 질문.


어쩌면 내 특기는 불합격일지도 몰라.

아니지.

내 특기는 불합격에도 포기를 모르는 것일지도몰라.


그렇지.

내 특기는 그거다.

불합격에도 계속 도전하는 것.

포기를 포기하고, 거절을 거절하는 것.



운이 없다는 말로 잠시 자존감에 위로를 받았지만, 결국 동그라미를 치지 않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엔 운을 내가 만들거나, 아니면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하고 운이 왔을 때 절대 놓치지 않는 것. 

마음속 깊이 면죄부 숨겨놓고 꾸준히. 열심히. 매일매일 하는 수밖에. 




아마 나는 또 3001번의 이유를 찾으려 나를 객관적으로 곱씹고 뜯고 괴롭히겠지만,

그러다 이내 나를 콱. 사랑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또 초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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