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삼킨 말
나는 여행을 하면 꼭 그 지역의 헌책방에 들리곤 했었는데,
꼭 변태처럼(..은 아니고 변태 맞는 듯)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찾아본 후 그 책들중에서도 맨 첫장에 편지가 쓰여있는 책을 고르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과거 진주 헌책방에서, 내가 사랑하는 책 <장그르니에의 섬> 첫장에서 발견한 소중한 편지다.
97.12.21
우리는 사랑으로 사막을 건너는 법을 배웠다.
그 견딤의 시간처럼 어디서든지 열심히 살리라 다짐하며.
아하.
97년도 겨울의 뜨겁던 그들의 사랑은 사막은 건넜지만
다른 무엇은 건너지 못했나보다.
견딤의 시간을 뒤로 하고 지폐 몇장에 팔려 전국을 떠돌았을지도 모르는 장그르니에의 섬.
혹은 이삿짐센터 아저씨의 실수로 버려져 그 사랑의 주인들이 엉엉 울었을지도 모르는 책.
혹은 애초에 '어디서든지' 라는 단어로 포장된, 각자의 삶을 응원하겠다는 계획된 이별의 선포.
무엇이 되었던 둥둥 세상을 떠돌던 그 사랑이 담긴 책은 결국 진주 어느 헌책방에 와닿아 완전한 타인인 내 손에 도달했다.
그래. 그들은 어디서든 열심히 살고있을거야.
나는 그 밑에 또다른 다짐들을 담아 함께 사막을 건너고 싶은 사람에게 주고,
그 누군가는 그 책을 한동안 보관하다가 어느날 사막도 가기 전 어느 유혹 넘치는 시가지에서 이 책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시 둥둥 떠돌다 소싯적 나같은 완전한 타인에게 닿을지도.
그밑에 또 다른 다짐들이 마치 댓글처럼 달리는 상상을 해본다.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것.
마음은 헤져있지만 책속의 글씨들은 아직도 사막을 함께 건너는 중이라는 것.
그래서 기억할 수 있다는 것.
헌책방에 가면 나는 위로를 받곤했다.
여러 마음과 여러 손을 걸쳐 끝내 비슷한 처지끼리 옹기종기모여있는,
폐지와 한끝차이인 그 아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헌책보다 더 헌 마음들이 담겨져있다.
너덜너덜하게 잊혀진
그렇지만 한때는 너무나 생생했던 예쁜 것들.
그렇게 사랑은 여러모양을 한 채 여행을 할 뿐,
사랑 그 자체는 언제나 함께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사막을 건너는 법을 배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