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뱉은 말
아마도 아주 예전, 연기를 시작하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연기 선생님이 네가 좋아하는 시를 읽어보라고 했을 때,
이 시의 첫 구절을 소리 내 읽다가 눈물을 쏟아냈던 때가 있었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면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
<청춘 , 심보선>
시를 읽다 목이 메어 아무 말하지 못하고 책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그렇게 꺽꺽.
모든 문장들이 거울처럼 느껴져서 쳐다볼 용기가 안 나던, 들춰보기도 싫어서 꽁꽁 숨겨놓고 우아한 백조마냥 헤엄치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여유롭게 그것도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이 시 한 문장 한 문장 쓰다듬어줄 수 있다만,
그 심심한 마음을 갖기까지 얼마나 짜디짠 눈물들과 함께 했었는지는 살피지 않아도 아예 몸에 각인이 되어있다.
절묘하게도 미해결로 남아있던 몇 문장을 소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했고,
다행히 부패가 아닌 숙성이 된 것 같아 아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뿐.
그 시절 나는 뭔지 모를 뜨거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고,
지금은 그 뜨거운 것들이 지나간 자리에 무언가를 연신 덧바르고 있는 중이랄까.
그것이 얼음인지 연고인지 더 뜨거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런데 문득.
아무것도 안 지나간 걸 수도 있다고, 저 멀리서 뜨거운 무언가가 온 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는 중이라고.
시절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그동안은 고요했던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보니,
미래의 언젠가, 그 시절이라고 부르게 될 지금 이 시절을,
다 겪어보기도 전에 벌써부터 사뭇 그리운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청춘이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또 다른 모양의 청춘을 보내고 있을 뿐.
생김새가 다른 오늘의 청춘도,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못생긴 청춘일지라도,
빛나고. 눈부시고.
그리고 혹 청춘이 이대로 지나가버려도
그래도, 그런대로, 좋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