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은 말3
“언니 팬이에요”
“아 예...(꾸벅)”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건방지게 나는 대답했다. 오해마시라. 촬영중이니까.
영화 속 대사인 것은 알지만 어쩜 이렇게 내뱉으면서 기시감 하나 느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참 낯선 말이다. 내 팬이라고? 그런데 고작 “아 . 네.” 라니.
현장에서의 경험은 놀라웠다.
실제 캐스팅 된 여주인공은 영화속에서 단역배우 역할을 하고 실제로 단역배우인 나는 영화속에서 주연배우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영화속에서’ 톱배우인 나를 동경해 인사를 하면 나는 그것을 받아주는 식이었고, 헤어 메이크업팀이 나만 봐주며 그녀가 소외감을 느끼는 씬이었다.
컷. 오케이.
그 소리가 들린 후 촬영이 종료되면 실제상황은 반대.
모든 스탭은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나는 어디있는지 모를 내 점퍼를 두리번거리며 10초라도 옷을 입으려 노력했다. 으덜덜 늦가을에 하복이라니, 춥다.
하는데 - 당시 속했던 소속사의 매니저오빠와 실장님이 현장에 왔다. 그래도 회사내 유일한 여배우라고 신경을 쓰고 싶었던 것일까. 계약당시 항상 내가 가져오는 작품만 해서 미안해서였을까. 혼자 가도 되는 현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둘이 늦게나마 현장으로 도착해서 나를 찾았다. 적어도 점퍼를 찾으러 두리번거릴일은 없겠어.
-근데 두명씩이나 데리고 다니느건 오바 아니야?”
한 스탭이 말한다.
아뿔싸. 이런 것도 문제가 되는 걸까.
-아니 네가 대단한 역할인 것도 아니고, 솔직히 단역인데 두명씩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현장에 있는거 보기 좀 그런거 같아. 내 생각은 아니고 나도 어디서 들어서 얘기하는거야.”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정말 그러면 안되는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촬영하는데 저 둘이 온게 그렇게 기분이 나쁜일이 되는걸까? 저 스탭분은 나한테 왜 저런말을 하는걸까? 정말로 들은 얘기가 맞을까? 아니면 아니꼬운걸까.
수많은 생각이 수초만에 지나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얼굴에 조금이라도 보일까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그래요? 그런건 아닌데 궁금해서 오셨나봐요 잘 얘기해놓을게요.
그럼 난 이제 저 실장님과 매니저한텐 뭐라고 얘기해야하지. 이걸 그대로 전달하면 저들도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가서 정말 괜찮으니까 추우니까 차안에 들어가있으라고 부탁을 가장한 신신당부의 선언을 몇번이나 하고야 다시 촬영장에 돌아왔다.
아 우울해.
아니 괜찮아. 그럴수도 있어.
살면서 수도없이 되뇌긴 세가지 기역(ㄱ)
그랬구나, 그럴수도 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그럴수도 있어 카드를 든다. 머릿속에 고정 시킨다. 그럴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지.
다시한번 그럴수 도 있다고 되뇌이며 다음 씬을 준비한다.
주연배우 역할인 나는 톱스타의 기량에 맞게 벤에 내리는 씬이었다.
내가 도도하게 내리면 매니저는 나에게 양산을 씌어주는 씬이었는데, 벤이 소품으로 대여된 벤이 아닌, 남자 주연배우의 실제 벤을 사용하게 되었다.
약속된 대로 벤에 탑승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를 받으면 문이 열리고 나는 그에 맞게 연기를 했을 뿐.
촬영이 종료되고 벤에서 완전히 다 나오니 나를 이곳저곳 살펴보며 누군가가 말한다.
-뭐 훔친거 아니죠?ㅎ..
정확히 뒤에 ㅎ의 자음을 흘려가며 질문인지 농담인지 조롱인지 모를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 좀 오랜시간이 걸렸다.
벤 안은 생각보다 더러웠고 거기서 누군가 훔칠 수 있는 물건은 그가 마시던 물병정도였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 남자배우의 팬도 아니었고, 설사 팬이라 하더라도 남이 마시던 물병을 훔칠정도의 크리피함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금괴 몇짝이 있더라도 누군가의 무언가를 훔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래도 꽤나 도덕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말에 정색하고 뭔 개소리를 정성껏 하냐고 할만큼의 담대함도 없었고, 그러게요 뭐라도 훔쳐서 경매장에 내놓을걸 그랬어요 라고 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그 스탭의 말이 꽤나 위트있는 농담인냥 포장된 웃음으로 보답하며 뒤를 돌아섰다.
차마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카드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도 써야하나?
돌이켜보면 그렇게 웃으면서 무수한 돌을 던진 사람들의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내 반응만이 모멸스럽게도 생생하게 기억날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상처받지 않은 척, 쿨한 척, 못 알아 들은척, 밝은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했던 , 그리고 돌아서서도 곱씹지 않고 무던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돌 맞고도 웃는 개구리.
마치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네가 그럴만한 일이 일어날 사람이었으니까 라고 낙인이 찍혀지는 것 같았기 때문에.
우울하고 힘들고 가슴 아픈 일들은 내것이 아닌냥 살아야 내가 살 수 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저런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나를 존중해주고 배려해주신 분들이 현장에는 더 많았다. 저 작품만해도 벤의 주인공인 남자 배우는 굉장히 젠틀했고,작품동안 끝까지 섬세하게 배려해주신 감독님과, 추울까봐 뜨끈한 핫팩을 주시며 응원해주셨던 배우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정말 감사한 일들은 많았으니까.
많은 헤진 기억들 속에서 내 배우커리어를 망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극을 줄 만한 에피소드를 고르는 데에는 위험한 도박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일련의 상처들을 곱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런 과정이 비단 배우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살다보면 아주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결국은 상처와 실패가 우리를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성장하게 만드니까.
그래 다음에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카드를 꺼내자.
돌 맞고 버럭하는 개구리 좀 되어보고, 밟히면 발작하는 지렁이 좀 되어보자.
뭐 그 전에 돌도 안맞고 밟히지도 않는 인간으로 존재하면 참 좋겠지만은.
돌아오는 밤 우리의 카니발안에서, 매니저 오빠가 튼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자이언티가 신곡을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데, 행복하자고 우리 행복하자고 그러는데 이상하게 더 슬퍼졌다.
그 우리에 나도 들어갈 수 있을까.
도저히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은 그 주문을 들으며 다짐해본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있으랴.
물론, 우리는 때때로 흔들리지 않아도 피는 꽃들을 마주하게 된다.
손바닥이 마주치지 않아도 소리가 나는 경우도 보고, 하늘이 스스로 돕지 않은 자를 도울 때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수많은 속담과 시들이 거짓일지라도, 나는 그 글들 밑에 밑줄을 벅벅 그을테다.
나는 흔들려야지만 피는 꽃인가보다.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