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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 Sep 24. 2016

날씨의 유혹을 거부하면 화를 입는다

토익을 보러 가는 길, 나는 미술관으로 튀었어야 했다.

유난히도 하늘은 높고 파랬다. 코 끝으로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섹시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건물 안에 있는 것이 꼭 죄인 것 같은 그런 날. ‘밖으로 나와라, 나와라’하는 폼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사실 거절할 마음도 없는 그런 날씨였다. 빌어먹게도 꼭 이런 날은 항상 시험을 보는 날이다.




토익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일찍 나선다고 나섰지만, 기분 좋은 날씨에 발걸음이 느려져 택시를 타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그 날은 정말 토익을 봐선 안될 날이었다. 택시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빛에 노곤해지고, 따뜻함에 취해 그 짧은 거리에도 나는 온갖 생각을 다했다.


 ‘이대로 차를 돌려 남자친구에게 갈까? 서둘러 서점에 들른 뒤, 소설을 하나 사고 분위기 좋은 카페로 가면 햇빛을 놓치지 않겠다. 아니다, 차라리 커피를 사서 한강으로 갈까?’ 


멀지 않은 거리를 가는 동안에도 나는 토익을 제쳐두고 어디론가 튈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시험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미룰 수 없는 시험이었다. 더 이상 토익을 멀리했다가는 아버지에게 “쪽박 차다 못해 망할 인생”이라는 악담을 피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 앉았다. 내 자리가 창가 쪽이라는 것에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날, 짜증나게 좋은 날씨가 하루를 망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다 날씨 때문이었다. 시험 보는 날 쓸데없이 햇빛이 좋아서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빛에 노곤해져 몇 번이고 듣기 스크립트를 놓칠 뻔 했다.따뜻하기는 또 얼마나 따뜻하던지 지문을 읽다가도 어느새 정신 놓고 있었다. 9월 주제에 온몸을 간지럽히며 끼 부리는 바람 때문에 내 앞사람은 졸다 못해 코를 골았고, 내 대각선의 사람은 시험 내내 자기 맨 발을 만져댔다. 그 추잡함은 고개를 숙여도 기어코 내 시야로 비집고 들어와 시험을 치르는 내내 역겨움이 턱 밑까지 솟구쳐 올라왔다. 의미 없이 날씨가 좋았던 탓이다.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2시간 동안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누군들 불만이 없었겠는가. 그 불만을 엄한데다 풀어대는데, 모조리 나한테로 튄 거다. 9월에, 가을 기운을 품고 밖으로 나오라 온갖 색기를 뿜어대는 날씨 탓이었다. 내가 시험을 망친 것도, 다.



이런 날에는 항상 아버지께 전화가 온다. “날씨도 좋은데 뭐 하나, 딸? 엄한 놈(은 남자친구) 만나지 말고, 이 참에 갈아 치워”하시면서. 어김없이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현 남자친구가 얼마나 괜찮은 놈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백화점으로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시험 망친 기분도 전환할 겸, 필요한 쇼핑을 할 요량이었다. 백화점에 다다르자 갈증이 났다. 귀와 입으로는 열심히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서 눈으로는 카페를 찾고 있었다. 백화점 안에 위치한 카페에 도착했을 때 자리를 잡고 앉아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나 뭐 해 먹고 살지?”


“누누이 말하지만, 영어 하나만 잘 해도 먹고 살 길은 충분히 많아. 죽어도 아빠 말은 안 듣지? 그 소리 하는 걸 보니 오늘 토익도 별 볼일 없었나보네.”


“에이 아빠, 내가 그걸 몰라서 문젠가? 영어로 먹고 살고 싶지 않으니 문제지.”


“그럼 뭐 해 먹고 살고 싶은데? 어릴 때부터 빨빨거리며 여기저기 쏘다니더니, 아직도 못 찾았나 보지?”


“뭐, 그게 말만큼 쉬운가? 이제 취업준비 해야 하는 데,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 백화점 쪽 지원서 쓰려면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은데."


“넌 뭐 해 먹고 살 지도 모르겠다면서, 백화점 취업할 생각은 어떻게 하냐? 순서가 잘못 된 거 아니야? 네가 하고 싶은 일도 모르겠다면서 직장부터 찾으면 어떡하니?”



아버지의 말씀에 갈증도 잊은 채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갑자기 커피보다는 맥주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아빠 회의 들어간다. 딸, 고민 더 해봐.엄한 놈 만나는데 시간 쓰지 말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시험을 끝내고도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다 날씨 때문이었다. 나들이 가기 좋은 날, 심지어 주말인 그 날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못하고 시험이나 보고 있을 딸을 한껏 약 올릴 심산으로 전화하셔서는 취준생 딸의 마음도 모르고 고민만 되려 던져주고 가셨다. 그것이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볕이 잘 드는 카페에서 일하는 남자친구 옆에 앉아 로맨스 소설이나 읽고 싶은데 나 홀로 백화점 안에 갇혀 햇빛도 못 보고 쇼핑이나 해야 할 그 날이 하필이면 날씨가 미치도록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내 메신저로 한 칼럼을 보내주셨다. <'직장'다닌다고, '직업'생기지 않는다.> 아버지는 대체 어디서 이런 칼럼을 찾으셨을까? 커피를 마시며 칼럼을 읽어 내려갔다. '기분 전환하러 왔다가 이게 뭐람.' 한껏 약이 올랐음에도 결국 칼럼을 다 읽어내곤, 몇 가지 고민할 거리를 다이어리에 적어둔 뒤 잊어냈다. 지금 당장 고민하기 시작하면 아버지의 술수에 휘말리는 것 같아서 알량한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칼럼을 읽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결국 나는 아빠의 술수에 걸려든 것이었다. 같은 고민을 두고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에 어디선가 아버지는 웃고 계실 것이 뻔하다. 이게 다 그 날 날씨가 환상적이게 좋은 탓이었다. 토익을 치르러 가던 택시 안에서 "아저씨, 미술관으로 가주세요"라고 말했어야 했다.







다 날씨 때문이다. 나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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