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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dreviews Feb 19. 2016

연애 찬미

이십대의 연애가 내게 준 선물

 '아홉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가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아홉 살, 특히  스물아홉이 되면 악운이 낀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전까지 비슷한 궤도를 그리던 삶들이 스물아홉 쯤이 되면 나만의 길을 선택해야 할 시점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나 한 사람 분량의 세상만을 고려했다면, 이때는 여태껏 지었던 세상을 더욱 견고히 하느냐, 아니면 파괴하고 새로 짓느냐는 차원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위치를 조금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자기 개발에 몰두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직이나 해외 생활 같이 이전에 시도해보지 못한 도전을 할 것이다. 연애 관계도 마찬가지다. 일부는 그동안 쌓아왔던 세상을 견고히 하고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다른 일부는 이전에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별을 맞이한다.  


 이십대 시절의 연애에 대해 내가 내린 선택은 후자였다. 비록 상대의 결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긴 했으나, 어쨌든 선택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7년이란 시간만큼, 그 선택의 대가는 가혹했다. 한동안 뇌 반쪽이 잘려나가고 팔, 다리가  한쪽씩 분리되는 것만 같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시간이 지나며 고통의 강도는 점차 옅어졌지만, 그럼에도 홀로 있을 때마다 ‘그와 함께 쌓아 올린 내 이십 대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곤 했다. 열정을  쏟아부었건만 결국엔 실패했다는 패배감, 내 존재가 통째로 거부당한  듯한 거절감, 아무리 소중한 것도 언젠간  무의미해진다는 허무함… 이별 후에는 상대를 향한 그리움보다 내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나와 같은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새로운 연애가 두렵거나 귀찮아 지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행착오를 겪는 일도 까마득하고, 타인에게 관심을 쏟기에도 당장 시간이나 재정적인 여유가 부족하다. '어차피 모두가 혼자인데, 뭐 어때, 손해 보는 연애를 할 바에는 혼자 만족하며 살 거야.'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 무관심해지고자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곳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혼자가 된 삶에 만족하고 내 자신만을 돌보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개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직 한창 신혼인 친언니 마저, “혼자 사는 게  최고야.”라고 외칠 만큼, 혼자 일 때보다 자유롭고 편한 상황은 없다. 결국 나는 길었던 연애의 터널을 지나 홀로 삼십 대를 맞이했고, 언니 말처럼 이전보다 지금이 좋고 편하다. 그런데 나는 문득 기형도의 시에서처럼 빈 집에 갇혀버린 지난 내 모습이 안쓰러워졌다.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을 잊기 위해 억지로 끌어올렸던 미움이란 감정, 내 이십 대는  그곳에 빠져 혼자 울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지난 연애는  상처뿐이었을까? 정말 내 에너지를 빼앗기기만 했던 사건이었을까? 실패로 끝난 관계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후회나 상대를 향한  미움밖엔 없을까?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목소리로는 대의명분을 외치면서도 노력의 목표는 항상 개인, 개인을 이기면 또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인 것이다.”  - 인간중독, 다자이 오사무, 북로드, p.112


 이 구절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국 개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주변 이웃이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폭력에 노출되어 위험에 처할지라도, 그 일은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타인에게 벌어진 일들이 자신의 일상에 들어와 개인적인 것이 되지 않는 이상, 나의 일처럼 여기며 관심 가지기 힘들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타인의 일을 내 개인적인 일보다 우위에 놓고 생각하지 못하는 데, 그건 악해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태생적으로 개인 수준의 일 밖에 보지 못하는 한계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 남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나 기쁨은 잠시 화젯거리가 될 수는 있겠지만, 수다를 위한 소재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특별하다. 이 감정이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있는 이들은 때때로  개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세상을 보고는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의 일을 내일 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관계 속에서 한 개인의 기쁨은 두 개인의 기쁨이 되고, 어려움을 함께 공유하며, 그렇게 서로의 세상을 확장한다. 물론 사랑하는 이가 골칫거리가 되어버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솔직해지자.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과연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애썼겠는가?


 연애는 개인으로 시작해 사랑을 통해 우리가 되는 과정이며, 만약 그 과정을 반대로  되풀이하면 끝을 낼 수 있는 독특한 상호작용이다. 연애 기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든 지 간에, 우리는 연애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만큼은 타인의 기분을 헤아리고 서로 맞추어 간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개인의 레벨을 극복하는 방법을 연습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개인주의 극복’이야말로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만연한 현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 일 지도 모른다. 사회 구조적 문제가 높은 담장처럼 사회를 둘러싸고, 개인 혼자서 뛰어넘기에는 불가능해 보일 때, 많은 젊은 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포기’를 택했다. 'N 포 세대'라고 불리는 우리는 불안한 사회에서 최소한의 안위를 확보하고자 연애, 결혼, 출산 등 다양한 인생 경험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을 도와주기는커녕 남에게 폐만 끼치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어찌 됐든 내 목숨과 안위만 지키려는 선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짝 몸을 낮추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 앞에서 눈알만 좌우로 굴리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 목숨 하나 챙기기도 벅찬데..."


 그러나 모든 상황이 암울하게 굴러가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해결책은 삶의 갖가지 경험을  포기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일단 모여서 자신의 고통을 나누고 타인의 고통도 들어주어야 한다. 어차피 개인이 가진 자원은 살아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통의 관심사와 뜻을 가진 이들이 뭉쳐서 서로가 가진 물질적, 정신적인 자원을 공유하고, 기성세대가 정해준 길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통해, 타인의 도움이 절실한 곳에 도움을 주는 것. 이것이 암울한 시대를 버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문제로만 가득 찼던 하루 중 일부를 떼어내어 타인에게 넘기고, 그 자리를 공동체의 문제로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해결책을 알고 있는 기득권층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적나라한 인간 본성을 자꾸만 상기시키려 든다. 혼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란 사실, 드넓은 우주 속 인간이란 존재는 먼지와 같다는 사실, 결국엔 넌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 '나도 이러한 문제를  통감하지만, 어차피 안 될 거야.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찍히기 싫으면 조용히 해야 한다. 발버둥 쳐 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아.’ 이처럼 무섭도록 진실한 메시지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와 우리의 머리 속으로 주입된다. 회사 선배가, 인생 경험 풍부한 어른이, 그리고 거대 언론이 주는 잔인한 사실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우리는 개인의 레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들 말처럼 애초에 한계성을 지닌 개인들은 혼자서는 절대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없고, 오직 타인과 함께 일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나의 지난 연애를 돌이켜보면, 후회나 미움 외에도 무엇을 얻었는 지 분명히 보인다. ‘개인주의 극복' 이것은 7년 동안의 연애가 내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때로는 나보다 상대의 꿈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그의 취향에 맞추려 했던 시간을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사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기쁜 마음으로 감당했던 일이었다. 덕분에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개인의 레벨보다 조금 더 높아졌으며, 내 자신 또한 전보다 단단해졌다. 즉, 사랑이란 감정과 열정으로 함께하던 시간 모두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훈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절 자신을 지킨답시고 마음껏 연애하지 않았다면, 난 개인의 레벨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줏대를 포기하고 타인의 입장으로 덧칠하는 과정이 늘 유쾌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덧칠했던 타인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더더욱 끔찍했다. 사실 아직도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난 상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하나는 해냈다. 이제는 전보다 더 넓어진 세상과 단단해진 마음으로 다른 세상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을 잃었으니,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맞이하는 일이 조금은 두렵긴 하지만 다행히 나는 사랑하는 관계를 통해서라야 어떠한 비관론이나 무기력증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를 비롯해 연애에 실패한 우리는 이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의 레벨에서 굳어있지 말아야 한다. 가슴 아픈 경험을 끌어안고 새로운 꽃을 피울 준비를 해야 한다. 연애란 열매를 맺든 맺지 못하든, 가치 있는 결과를 낳는다. 그 끝과 상관없이 연애는 그 자체로 기쁜 일이다.


 빈 집에 갇혀 울던 내 이십 대에게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지난 연애는 실패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크나큰 진보였다고. 7년 동안 사랑했던 에너지가 나를, 그리고 이제는 타인이 된 그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우리.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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