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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Feb 24. 2017

별안간 어머님

D+81, 엄마의 외출이 무산되다.

오늘은 컬러테라피 스튜디오에서 열리는 명상클래스에 참석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저께 명상독서모임으로 주중 남편 찬스를 이미 써버렸으나, 마침 남편이 이른 퇴근이 가능하다기에 어젯밤 환호를 지르며 참석할 수 있다고 단톡방에 외쳐댔다. 

외출 한시간 전, 요즘 한참 춘이와 나는 먹(고)-놀(고)-잠(자고)패턴의 합을 맞춰가고 있기에 혹시라도 이 흐름이 깨질까 남편에게 각 단계별 춘이의 상태와 대처방안을 구구절절 설명해댔다. 또 춘이의 먹는 시간과 내 밥통 용량이 최대인 타이밍을 맞춰야 너도 좋고 나도 좋은지라 춘이를 달래가며 최적의 수유 타이밍을 노려 밥을 대령하고 팡팡 트림을 시켰다. 그 와중에 세수하랴 밥먹으랴 눈썹 정도는 그리랴 바쁜데 남편은 중간중간 아기띠 버클 좀 채워달라 춘이 이불좀 펴달라 게임 따악 한판만 할테니 애기 잠깐만 봐달라 주문은 밀려들고..  혼자 종종걸음으로 왔다갔다 한시간동안 진을 빼고는 드디어 멋지게 문을 나서려 할때 전화가 왔다. 

'어디세요? 죄송하지만 오늘 클래스는 취소되었어요..'

간만에 머리를 딩 한대 맞은 느낌을 받았다. 

평소라면 예정된 일정이 취소되도 크게 당황하진 않는데, 이번은 오늘 하루동안의 종종거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엇보다 오늘 굳이 안해도 되는 샤워를 젤 소중한 잠자는 시간과 바꿔가며 했던 게 젤 억울했다. 그것도 남편 출근 하기 전에 맞춰하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고속으로 문질러대며 빨리 끝내느라 힘들었는데...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춘이의 보채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먹놀잠 패턴 중 잠 타임이 왔다! 

내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방에 가서 잠투정을 한껏 부리는 춘이를 한참 토닥토닥하여 겨우 재웠다. 

하루의 피로가 일찌감치 밀려왔지만, 이 흔치 않은 주중 저녁의 프리타임을 그냥 넘길 수 없어 남편에게 뒤를 부탁하고 얼른 서점으로 달려갔다. 책 읽기에 최적화 되어 있어 늘 아른거렸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읽으려 했던 '존 카밧진의 처음 만나는 마음챙김 명상'책을 펴들고 자리에 앉았다.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추고 내가 아까 왜 그렇게 당황스럽다 못해 화가 났을까 잠시 숨을 고르고 내 감정을 바라보았다.

일단 외출 한번의 절차가 참 까다로웠고 그 절차를 통과하느라 이미 약간 피곤했다. 그리고 오랜만이 얼굴보며 함께하는 명상을 기대했는데 내가 설렜던 양만큼 상대방은 설레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속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조금 더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확실히 떠오른 두 가지, 1) 나 스스로가 누구에게 설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2) 상대의 단점보다 그 상대로부터 받은 것들에 포커스를 맞추면 내가 상대에 끌려다니지 않게된다 라는 생각의 전환이 꽤 빠른 시간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간 명상과 컬러테라피로 키워온 마음 근육의 힘을 느낄 수 있어서 기쁘기까지 했다. 

이렇게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자 아까의 감정은 사라지고 저 두가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느라 내 머릿속은 바빠졌고 또 그 바쁨이 즐거웠다. 

읽다만 책과 내 소중한 컬러테라피스트 콘텐츠들을 정리할 클리어 파일을 정성들여 골라 담고는 서점을 빠져나와 춘이를 돌보는 동안은 먹기 힘든 일본 라멘을 오랜만이 온 감각으로 먹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렇게 상대에게 쏠려있던 감정을 비우고 '나'에 포커스를 맞추자 여유가 생겨 피곤했을텐데 춘이를 봐준다고 한 남편한테 새삼 고마움이 밀려와 남편에게 줄 새우튀김을 손에 들고 룰루랄라 집으로 귀가했다. 


문을 열고 쟈기 고마워 최고야! 라고 외치려는데 춘이를 티비 바짝 앞에 둔 바운서에 앉힌채 신나게 축구게임을 즐기시는 님을 보자 그 말 대신 우리 춘이 방치하고 도대체 뭐하는거야!라는 잔...소리가 대신 나갔지만, 뭐 어떠랴.. 오늘 몸으로 체득한 깨달음을 두 개나 얻었는데! 


본의 아니게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얼른 들어가 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제일 아재같은 춘이 얼굴 한번 들여다 보고 자야겠다. 아, 한시간뒤에 또 만나겠구나. 


공간의 중요성. 내 마음에도 더욱더 큰 공간들이 생기길..
요즘은 뭘 먹어도 나가서 먹으면 저절로 먹기 명상이 가능해진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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