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따뜻한 인연들..

인생의 보온도시락이 되어주어 감사합니다.

by 유월 토끼


몇 해 전만 해도 찬바람이 불어오면 겨울을 대비하는 큰 행사가 몇 가지 있었던 것 같아요.

김장을 준비하는 집에서는 고랭지 배추를 미리 예약하고 양념을 준비하기 위해 곱고 고운 태양초 고춧가루를 찾아다녔던 엄마와 이모님들의 모습을 보고, 드디어 겨울이 오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보온내복과 목도리 장갑을 찾아 꺼내어 두었네요.

유난히 추위를 힘들어하는 저는 겨울이 오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인생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도 매서운 추위와도 같은 힘든 순간을 만나게 되죠.

그때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팩과 같은, 따순밥이 담긴 보온도시락의 온기를 전해주는 따뜻한 인연들이 있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모양의 말을 하지 못해 마음속 서랍의 귀한 보온도시락의 모습으로 보관해 둔 분들에게 보내지 않을 편지에 달달한 마음을 남김없이 꺼내 놓으려 합니다.




몽이언니, 석이언니 여전히 씩씩하게 온 동네 김장준비를 주도하며 겨울맞이를 준비하고 있나요.

시끌벅적 아이들이 와글와글 몰려다니며 뛰어놀 수 있었던 동네를 떠나온 지 벌써 10년이 되어갑니다.

엄마인 저의 말은 안 들어도 몽이이모, 석이이모의 한마디면 즉각 움직임을 보이던 아이들이 이사하고 오랫동안 그 동네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추억의 조각들을 자주 꺼내어 먹었답니다.


언니들이 살고 있던 동네로 우리가 이사하고, 동갑내기 아이들이 친구가 되어 유치원을 함께 다니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예비 학부형 모임을 하면서 더 가까운 이웃이 되었지요.

초등 1학년의 깊은 가을 언니들이 겨울김장 준비를 해야 한다며 김장 배추예약을 주문받아 갔었어요.

맛있는 배추를 재배하시는 농부지인에게 몇 해째 주문해서 김장을 담근다며, 한 번도 김장을 해보지 않았던 저에게 함께하자 도와줄게, 송 씨 집안의 김장김치 양념을 전수해 준다며 처음이자 마지막 김장하는 기회를 만들어 사건을 기억하시죠.


대부분 친정엄마가 담가주시는 김치를 먹거나 특히 김장철에는 김치냉장고 중간 통으로 2 통정도 김치 담가 주는 곳에 주문해 먹었던 저는 언니들의 요란한 말솜씨와 추진력에 이끌려 김장의 날을 잡아 버리고 말았죠.

한창 바쁘게 일이 잡혀있던 12월, 저의 스케줄은 빈틈이 없었고 배추는 도착했고 소금에 절여낼 시간을 만들지 못해 쩔쩔매던 때, 언니들이 저녁식사 후 우리 집 마당에서 배추를 다듬고 소금을 뿌려가며 커다란 대야에 담가 절여두고 갔었어요.

퇴근한 저는 깜짝 놀라 언니에게 전화했었고, "괜찮아! 헌데 내일 아침 7시쯤엔 배추를 헹궈서 물기가 빠질 수 있도록 해두고 출근해. 그럼 우리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가서 김장해 둘게"라고 했어요.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내일 배추를 헹궈 물 빠질 수 있도록 잘해두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이 되어 배추를 행구다 보니 행군 배추들이 (야심 차게 친정엄마에게도 선물하려고 30 포기를 준비함) 생각보다 양이 많았고 배추의 물을 빼기 위해 담을 구멍 송송 바구니가 전혀 없었던 거죠.


마당을 아무리 뒤져봐도 나에게는 배추를 담아 올려 물이 빠지게 할 수 있는 도구는 절대 없었고, 출근시간은 다가오고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 마당 한편에 세워진 것이 스댄(대자) 빨래대가 눈에 들어왔어요.

딱' 적합한 도구를 찾았다. 다행이다를 외치며, 평소와 다른 빠른 손놀림으로 배추를 헹궈 양말짝 널듯이 배추사이를 벌려내 빨래대에 척척 걸쳐냈지요.

물기를 빼주는 데는 최고의 조건이 아닐까?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데 30 포기 배추가 다 들어가진 않더라고요. 고개를 들어 보니 마당에 담벼락과 연결된 빨랫줄이 비어있었고, 남은 배추를 모두 널어 둘 수 있었던 거죠.

약속을 지키고 출근을 하는 저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뿌듯했는지 몰라요.


출근을 했고 첫 예약고객을 마무리하고 남편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연락했더니, "도대체 뭘 해두고 간 거야? 온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우리 집 마당을 구경하러 왔고, 석이아빠가 보고 와서 자기에게 전화로 알려주더라. 배추를 빨래줄과 스댄 빨래대에 열어두는 희귀한 일을 처음 봤다면서... 어서 와서 보고가래 나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라는 남편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전화를 끊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침일을 다시 떠올려 보았어요.

왜? 뭐가? 어떤 게 구경할만한 거지. 물이 빠져야만 하는 배추를 빠질 수 있게 하고 왔는데... 온 동네 구경거리가 되었다니..?


점심식사를 마치고 언니와 통화를 했고, 아이들 등교시키고 몽이언니와 석이 언니가 함께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배추가 양말짝처럼 빽빽하고 질서 정연하게 열려있는 모습에 박장대소하고 이웃집 아주머니들을 불러 모아 구경시켜 주었고 덕분에 12월 한 달간 이웃들과 시장통 반찬가게 사장님에게 인사받으며 지냈던 해가 생각납니다.

(지금까지도 빨래대에 배추 널어 둔 여자로 남편과 지인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있음)


30 포기의 김장김치를 정성껏 담가준 언니들 덕에 처음으로 김장배추도 씻어 열어보았고, 맛있는 김치를 엄마에게 선물도 해보았네요. 그해 김장을 끝으로 저는 더 이상 김장을 담그지 않았어요.

잘할 수 없는 일을 하려다가 여러 사람 함께 고생하고 집안 곳곳이 초토화될 것이 뻔한 그림에 남편과 저는 맛있게 담가진 김치를 사 먹는 것으로 선택했었답니다.


그 이후로도 몽이언니와 석이언니가 김장철마다 담아 보내준 귀한 김치를 오랫동안 먹으며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었네요.

김장이라는 큰 일을 치르는 과정을 지켜보며, 좋은 배추와 소금을 선택하고 고운 고춧가루를 준비해 절이고 씻고 물 빠짐의 시간을 두고, 양념을 준비해 배추에 먹이고 예쁘게 감아낸 김치를 장독이나 김치통에 쌓아 보관하기까지 정성과 시간과 노동을 측정하거나 값을 매길 수 없지요.

긴 시간 사랑 가득 담긴 김장김치를 먹어온 저는 '고마워요'라는 인사말과 언니네 가족들이 먹을 간식을 전하는 것이 다였네요.


김장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과정에서도 친정언니의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주었던 크고 작은 감사의 순간이 가득합니다.

이사를 하고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고 조금씩 연락하는 횟수도 줄어들었지만, 저의 일상생활에서 여전히 언니들의 따뜻하고 뜨거웠던 마음과 배려와 보살핌의 기억들이 추운 겨울 보온도시락을 꺼내어 먹는 맛과 따스함이 힘든 순간에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내는 최애 영양제가 되어 주고 있답니다.

언니들과의 다정한 추억을 달콤하게 쫀득하게 감사와 사랑으로 표현할 단어가 없어요.

언니들과의 만남은 '인연의 복'인거죠.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며 언니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챙겨 들고 보고 싶어 하는 저를 보여주러 곧 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10살 차이의 동네 친구이자 귀한 가족이 되어준 몽이언니, 석이언니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함께했던 시절 정말 행복했습니다.